아들이랑 부엌에서 볶음밥을 만들어 먹기로 약속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베이컨을 꺼내 도마 위에 올려놓으며 아들이 불쑥 던지는 말 :
"베이컨은 뱀의 고기야?"
엥? 이건 또 뭔 말인가 싶어, "왜 그렇게 생각했어?" 하고 물으니,
"뱀처럼 기니까."
오...! 뱀과 베이컨.
도저히 교집합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대상이, 이런 식으로 같이 엮이다니ㅎㅎ
아이가 도마 위에 펼쳐둔 가로로 기~ㄴ 베이컨을 찬찬히 보고 있자니,
왜 그런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가늘고 긴 것이.. 중간에 줄무늬도 있고..^^
어른 입장에서 생각하면, 좀 끔찍하고 징그러운 연상이긴 하지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아이 특유의 상상력과 즉흥적인 말이 너무 사랑스러워 엄마는 폭풍 뽀뽀를;;^^
무덤덤한 오후의 부엌 공간에 요리 시작부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자! 이제 정말 베이컨 볶음밥, 만들어 볼까!
먼저, 냉장고에서 필요한 야채를 골라보자.
오늘은 당근이 없어 좀 심심한 색깔의 볶음밥이 되겠지만
양파랑 아이가 좋아하는 부추, 그리고 달걀도 준비해야지.
부엌 한쪽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아이를 앉혀놓고 양파를 까게 한다.
부엌육아를 할 때는, 요리를 하는 중간중간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는 뭔가를 줘야
아이가 움직이지 않으니, 엄마가 잠시라도 덜 산만해질 수 있다.
이때 엄마의 속마음은
'양파야 양파야, 제발 천천히 껍질을 벗으렴..'
그런데 간절한 엄마의 이런 바램에도 불구하고, 눈깜짝할 사이 아이는 큰소리로 외친다.
"다 깠어요!!!!"
응.. 그..래? 이럴땐 되게 빠르네..? 천천히 하질 그랬어.. 쩝.
같은 부엌육아를 해도 첫째와 둘째는 어쩜 이리 다른지.
첫째는 먹는 것보다 만드는 과정을 좋아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빵이나 케잌같은
지구력과 인내심이 요구되는 재료와 메뉴를 주로 선택한데 비해,
둘째는 먹는 걸 좋아하고(특히 고기를 비롯한 고열량 식품;;) 성격이 급해,
볶음밥이나 면요리처럼 후딱, 빨리, 완성되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한다.
첫째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든 요리를 새모이만큼 떼어먹고는 주로 감상하는데 비해,
둘째는 그릇에 담자마자 들고가서 정말이지, 놀라운 속도로,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이런 식욕을 타고난 둘째라서, 베이컨=뱀고기와 같은 등식을 상상해 냈는지도 모르겠다.
큰아이 때는 아이가 워낙 느끼한 음식을 먹기 싫어해서,
햄, 베이컨같은 낱말을 말하는 걸 들어본 적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쨔잔! 드디어 볶음밥 완성.
유아용 작은 밥그릇에 꼭꼭 눌러담아 그릇에 엎어놓으면
동그란 산모양이 된다. 아이의 제안으로 볶음밥을 함께 만든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잘했다.
40년 넘게 살면서 볶음밥을 수도 없이 만들어 먹었지만
이 날 아들의 '뱀 고기' 발언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자다가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남편에게 이날 있었던 일을 문자로 보냈더니,
이런 답글이 도착했다.
"우리집 육아사에 남을 명대사가 또 하나 탄생했네!"
가만 생각해보면,
키가 1m 즈음 아이들의 상상력과 언어가
인간 전체의 삶 중 가장 반짝이는 때가 아닐까 싶다.
어느 뇌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단순한 수학문제를 풀 때보다 야채를 썰 때 뇌가 더 활성화된다고 한다.
그 어떤 걸작 그림책에서도 보지못한
어린 아이의 빛나는 언어들..
요즘 나는 부엌육아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고 있다.
내일은 또 아이와 함께 무얼 만들까?
뱀 고기 빼곤 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