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잼.jpg

 

진짜 진짜 바빴는데.... 3일 동안 잼을 만들었다. 이게 다 친정 아빠 덕분이다.

태풍  '너구리'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친정 부모님은 게으른 딸이

큰 비 오기 전에 농산물을 알뜰하게 수확하지 않을 것을 미리 걱정하시고

두 분이 직접 수확하러 오셨다.

엄마는 밭에 남아 있는 강낭콩을 따고 있는 동안 아빠의 눈이 뒷마당 가는 길에

있는 살구나무로 향하신 것이다.

그 나무는 길목에서부터 1미터는 넘는 옹벽위에 자리잡은 우리 뒷 마당에서도

길가쪽으로 가지들을 모두 벋고 있어 열매가 달려도 남편과 나는 그동안

따 먹을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아빠는 장대를 들고 사다리를 통해 직접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시더니 아슬아슬한 자세로 가지에 매달려 장대로 살구를 털기 시작하셨다.

나는 오후에 있을 마을 협동조합 회의 자료를 만들다가 아빠의 호출에 달려나가

골목으로 떨어지는 살구를 주워야 했다.

 

잘 익은 살구는 떨어지면서 다 터지고,  덜 익은 것들은 한쪽 면이 으깨져 버리는데

아빠는 이 방법 밖에 없다며 살구 터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깨지고, 뭉그러진 살구를 이룸이와 열심히 주웠더니 네 소쿠리나 나왔다.

씨알이 굵은 살구는 이룸이 주먹만해서 서너개만 먹어도 배 부를 정도였다.

 

살구.jpg  

 

부모님이 발라 드신다며 조금 가져가시고 세 소쿠리를 남겨 주셨는데

한쪽이 으깨진 살구들을 그대로 두면 모두 못 먹게 될 것 같아서

그날 밤에 가족을 모두 재운 후에 나는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아 가며 살구잼을

만들기 시작했다.

칠순이 넘은 친정 아빠가 반 나절을 애써서 따준 열매들을 어떻게 해서든

먹어야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살구잼 3.jpg

 

뭉그러진 과육을 칼로 도려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설탕에 버무려 끓이는 일은

꼼짝없이 불 앞에 서서 나무주걱을 젓고 또 젓는 일이었다.

오전 내내 살구 줍고 집안일 하고 오후엔 내내 마을 조합에 나가 봉사하고'

저녁엔 회의까지 하고 집에 와서 밀려있던 집안 일 다 해 놓고 다시 잼을 만들기

위해 서서 일 하는 것은 몇 년 전의 나 같으면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

살구가 물러지든 말든 피곤하고 귀찮으면 모른척 하고 자 버리던 나 였다.

텃밭에 푸성귀가 넘쳐나도 애써가며 알뜰하게 챙겨 먹는 일에도 서툴렀다.

한마디로 귀찮았고, 늘 다른 일에 더 마음이 가 있었고, 그런 것들이 귀하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었다.

 

아파트를 떠나 어설픈 농사를 짓게 된지 어느덧 4년.. 나는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 내가 지은 것들이, 내 집에서 나는 것들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이 힘들고 할 일이 넘쳐도 가끔은 잠까지 미뤄가며 푸성귀들을 다듬고

절이고 김치를 담곤 한다. 덕분에 매년 할 줄 아는 일이 늘고 있다.

올해는 앵두효소도 담갔고, 알타리 김치도 두 번이나 만들었다.

이젠 살구잼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앵두의 계절이 지나가고 오디와 산딸기의 시절도 지나갔는데

살구가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고보니 내가 사는 집은

온통 과실나무가 집을 둘러싸고 있다. 앵두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자두나무 등등...

우리가 이사오면서 심었던 자두나무는 열매가 보잘것 없지만 다른 나무들은

모두 철마다 과실들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처음엔 감탄하며 맛 보기 바쁘다가

해를 넘기면서 효도도 담그고, 말리기도 하고, 이번엔 잼 만들기도 도전하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아파트를 떠난지 4년 만에 제법 철이 든 셈이다.

 

살구잼 2.jpg

 

처음 만든 잼은 너무 졸여서 꾸덕 꾸덕 했지만 두번째 부터는 농도를 잘 맞춰서

새콤하고 맛있는 살구잼이 되었다. 남편은 그래도 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처음 만든 잼을 모두 환영해 주었다.

세 소쿠리의 살구를 다듬어 끓이고 졸여 잼을 만드라 이틀밤을 잠을 설치고

그리고도 하루 반 나절을 불 앞에서 보내야 했지만 크고 작은 병 열 세개를 채우는

잼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도 먹고 친정, 시댁 시구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이웃과도 같이 먹을 생각에

마음이 다 뿌듯했다.

 

당장 아이들 피아노 레슨을 해 주시는 선생님께 선물 했더니 너무나 좋아 하신다.

요가 선생님도 좋아하실 것이다. 큰 아이는 그새 학교에 가서 자랑을 해서

작은병으로 하나 가져가서 선생님과 반 아이들과 맛보기로 했단다.

다 좋다. 내 정성으로 만든 음식을 많은 사람들과 나눈다는 일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말이다.

 

살구잼.jpg

 

엄마가 잼 만드는 일을 제일 많이 도와준 이룸이는 잼을 담은 병에 귀여운

라벨까지 그려서 붙여 주었다. 노란 살구가 잼이 되었다는 뜻이란다.

제 이름을  써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선물받는 사람들 기쁨이 한층 커졌다.

 

나이 들 수록 내가 정말 주고 싶은 선물은 이런 것이다.

오늘 딴 애호박이나 잘 익은 강낭콩 한 봉지 같은 것, 내가 담근 앵두 효소나

살구잼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집의 자연이 키워 내고 내 정성이 더 해서

만들어진 것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까.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도 자연은 넘치도록 풍성한 것들을 안겨준다.

조금만 더 애쓰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많은 사람과 더 오래 나눠 먹을 수

있으니 조금 더 수고하는 것이다.

 

올해는 친정 아빠의 수고로 맛있는 살구잼을 다 만들게 되었다.

처음엔 쩔쩔맸지만 이젠 잼 정도는 자신있게 만들줄 알게 되었으니

이 집은 살면 살 수록 내 능력과 재능을 늘려주는 집인 모양이다.

 

하지 감자 캐 놓고, 앵두 효소 걸러 놓고, 살구잼을 넉넉하게 만들어 놓고 나니

긴 장마가 와도 왠지 마음이 든든하다. 멀리서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내가 장만해둔 것들로 차도 내고 음식도 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라.

이렇게 살고 싶어서 아파트를 떠나온 것인데 어느덧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 속에 있다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머를 크게 치는 나인데 살구 덕분에 나는

재미도 있고, '잼'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크하하

우리집에 놀러 오시라. 새콤한 살구잼이 듬뿍 발린 빵을

대접해 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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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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