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이와 이룸이.jpg

 

지난 주말의 폭염은 정말 대단했다.

산에 바로 붙어 있는 우리집이 다 더울 정도면 시내는 정말 심했을 것이다.

그 폭염속에 윗밭의 감자를 캤다. 한 상자 심었는데 열 상자도 넘게 나왔다.

감자 풍년은 반가왔지만 날이 덥다고 함께 캐는 시늉만 하고 도망가버린

아이들 대신 남편과 나 둘이서 일곱 고랑의 감자를 캐서 담고 옮기는 일은

허리가 휠 만큼 힘들었다.

 

일요일 캔 감자를 월요일에 친정으로 날랐다. 화요일부터 장마라고 하니

미룰수가 없었다. 인천 부평에 있는 친정집으로 감자 세 상자를 실어 나르고

친정엄마 모시고 근처 마트에 가서 카트 가득 장을 봐 드리고나서, 다시

산본으로 날아와 목요일에 있는 강의에 입고 갈 옷을 사느라 지루하다고 징징대는

두 애들 달래가며 옷 가게를 누비고 다녔다.

간신히 옷 몇 가지 고르고 나서 우리 식구 먹을 장을 봐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더니

오후 6시가 넘어 있었다.

 

운전도 많이 했고, 많이 걸었고, 무거운 물건을 4층 계단을 걸어 올라 들어드렸더니

다리며 허리가 어찌나 아픈지 그대로 아무데나 눕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나있었다. 개수대에는 아침 먹은 그릇부터 그대로

쌓여 있고 장을 봐 온 재료부터 다듬어 반찬을 만들려고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부랴부랴 설거지하고 콩나물 데치고 된장찌개 끓여가며 저녁 차리는 일은 더뎠다.

배는 고픈데 시간은 걸리고 그래도 애써가며 이것 저것 서둘러 준비하느라

널을 뛰고 있는데 윤정이와 이룸이는 오늘 따라 징글징글하게 싸우고 울고 불고

난리가 아니다.

 

간신히 밥상을 차려서 애들하고 앉았더니 일곱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서둘러 밥 한술 뜨려 하는데 이룸이가 밥 먹여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저 혼자도 잘 먹으면서 늘 먹여달라고 졸라댄다. 실랑이 하는 것이 귀찮아서

먹여주곤 했는데 그러다보면 늘 내가 밥 먹는 것이 제일 늦었다.

오늘은 먹여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지쳤고, 배가 고팠다.

'너 혼자 먹어' 했더니 징징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난, 아직 어리거든요. 엄마, 어른이 아니라구요'

'네살이면 혼자서 밥 먹을 수 있는 나이야. 실제로 혼자 잘 먹잖아'

'아니거든요?'

난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밥을 떠 넣었다. 이룸이는 조르다가 울다가

내 팔을 붙잡고 자기를 봐 달라고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내가 아무말 하지 않자 이룸이는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룸이는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달래고 어르면 또 잘 풀어져서 저 혼자서도 잘 먹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난 이런 상황이 지겨웠고, 무엇보다

요령껏 대처할 힘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지쳐있었다.

그냥 내 밥 한공기를 방해받지 않고 끝까지 다 먹고 싶을 뿐이었다.

이럴때가 제일 위험하다. 경험상으로 이런 순간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하기 쉽고 아이들의 반응에도 마음을 닫기 쉽다.

이런 상황까지 가기 전에 내 힘을 먼저 추스르고 돌봐야 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룸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우느라 땀으로 얼굴이며 머리가 푹 젖어

있었다. 나중에는 안아 달라고 매달렸다. 따스하게 안아주면서

달래주면 되겠지만 더운 날 가스불앞에 서서 더운 음식을 만드는 일에

지쳐버린 나는 온 몸이 뜨끈뜨끈한 이룸이를 품에 안고 싶지 않았다.

그 더움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밥, 다 먹고 안아줄께' 하고서 묵묵히 밥만 떠 넣었다.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다. 평소에 애들의 감정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주자고 생각하며 살지만 아이들 마음속이

훤히 보이면서도 마음이 열리지 않고 몸이 향하지 않는

순간 말이다. 너무 지쳐있을때, 체력이 바닥이 나서 완전히

소진된 기분일때, 혹은 내 감정을 감당하는 것 만으로도 벅차서

아이들까지 받아 줄 여유가 없을때 엄마들은 한없이 강팍해지고

메말라간다. 이런 순간엔 아이들도 어쩔수 없이 상처를 받을 것이다.

나 역시 상처가 된다. 그런데도 손이 내밀어 지지않는다.

이럴때 누군가가 필요하다. 너무 지쳐있는 엄마 품에서

잠시나마 힘들게 하는 아이를 거두어 가는 손길,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고 풀어주고 엄마가 조금 쉴 시간을 주고, 다른 표현과

방식으로 아이를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육아의 힘든 고비가 또 한번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순간에 나에겐 윤정이가 있다.

3남매중 둘째로 태어나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서 늘 사람간의 감정과

균형에 민감한 윤정이는 어떤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본능적으로

안다.

윤정이는 안타깝게 이룸이를 바라보다가

'이룸아.. 잠깐 언니랑 안방에 갔다오자' 하고 동생을 부른다.

'안방에? 왜?'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이룸이는 언니를 따라 일어선다.

엄마의 관심을 얻지 못해 서운한 마음은 언니가 저를

달래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는 것이다.

 

윤정이는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룸이가 좋아하는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도 침대에서

춤을 추는 모양이다. 이룸이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분위기를 파악한 필규까지 합세해 셋이서 부르는 난데없는 캐롤 소리가

온 집안에 울러 펴졌다.

'울어도 돼, 울어도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도

'선-물을 주-신대'

 

한바탕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룸이는 눈물이 번진

얼굴로 방글거리며 나타났다.

'엄마. 미안해요. 밥 먹을께요' 하면서 수저를 든다.

나도 미안해서 밥 술 위에 이룸이가 좋아하는 콩나물을 듬뿍

얹어 주었다.

윤정이가 조용히 내 곁으로 와서 먹다 남은 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나는 살그머니 윤정이의 등을 두드렸다.

'고마워.. 엄마 대신 이룸이 마음 풀어줘서...'

윤정이는 엄마 마음 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 표정이 얼마나 사려깊은지 갑자기 울컥했다.

엄마도 누군가 달래줄 사람이 필요하지요.. 엄마도 힘든거 알아요..

하는 표정이었다.

 

늘 그랬다.

내가 화났을때, 속상할때, 지쳐있을때 그때 윤정이가 조용히 등장한다.

나 대신 오빠 마음 풀어주고, 동생 달래주고, 시중 들어주고

웃게 해주고, 다시 편안해질 수 있도록 불편한 사이를 다니며

부드러움과 웃음을 채워주는 것이다.

이제 겨우 일곱살짜리 여자 아이가 사람간의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들여다볼 줄 알고, 그 사람의 허전한 곳을 채워줄 줄

아는 것이다.

 

윤정이의 재치와 노력 덕분에 저녁 식사는 무사히 끝났다.

내가 먼저 먹고 일어나자 윤정이는 이룸이 곁에 남아서 마지막 한숱갈까지

알뜰하게 걷어 먹도록 도와 주었다.

자주 성숙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엄마덕분에 어린 딸이 일찍 의젓해진것

같아서 미안할때도 있지만 큰딸 덕분에 나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위로 받고, 내 모습을 새롭게 들여다 보게 된다.

 

엄마도, 부모도 누군가의 이해와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남편이든, 아들이든, 딸이든, 막내든, 그 순간 엄마에게 손을 내밀고

그 마음을 잡아주고, 필요한 것들을 내어 줄 수 있다면 살림과 육아로

지친 엄마는 정말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서로 기대고, 서로 위로해주고, 서로 살펴주고, 가끔은 그 사람 대신

그 사람 몫을 가만히 채워주면서.. 가족은 그렇게 살아간다.

 

어리지만 큰 딸이 있어서 늘 든든하다.

딸의 마음도 잘 헤아릴 줄 아는 엄마가 되고싶다.

고맙다..

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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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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