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설계해보기 위해
자신의 사진들 중 핵심적인 것을 모아서 
소개 글과 함께 만드는 것이 사진 자서전이다.

나는 웰다잉 강의를 할 때, 
나의 사진 자서전 첫머리에 붙어 있는 오래 된 사진을 소개하곤 한다.

크기변환_송강호 사진.jpg

대안학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웰다잉 수업을 하면서
위의 사진 속 국민배우를 찾아보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오른 쪽 여자 사람을 가리킨다.
"얘들아, 그건 바로 나야.
젊은 시절의 내가 배우로 보이니? 호홋."
화색을 띠며 내가 말하자 아이들이 답했다.
"선생님, 대체 2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사진 속 젊은 날의 송강호를 알아내지 못했다.

이 사진이 내게 특별한 이유는, 
우연한 방식으로 삶의 지도를 보여준 배우 송강호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해본다.

20세기 후반의 어느 날, 
집에 한가로이 누워 영화잡지를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당시 떠오르는 스타였던 송강호라는 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읽던 중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생각나는 바가 있어 몇 년 전 담임 반 아이들과 함께 만들었던 학급신문을 찾아보았다.
어느 교육연극이 끝난 후 우리 반 아이들의 취재에 응했던 
젊은 배우의 이름과 사진이 거기 있었다. 
송강호.
얼굴도 이름도 완전히 잊고 있던 그 배우를,
잡지 기사 몇 줄로 기억해낸 것이다.

학급신문의 취재에는 이런 문답이 실려 있었다.
“아저씨는 연극 공연 중에 대사를 잊어버린 적이 있나요?”
“대사가 입에 붙을 정도로 연습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다.”
사전 약속 없이 불쑥 취재를 하러 온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겸허한 자세로 임했다.
무명배우 시절이든 유명하게 된 시점이든, 크게 달라진 바 없이
자신만의 일관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후 몇 년이 흘러
그를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났다.
2006년 여름, 나는 어린 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며칠 후 
넋이 나간 채로 영화관에 앉아 있었다.
그날 우연히 본 영화의 제목은 ‘괴물’.
영화 속 송강호는 딸을 구하기 위해 
그야말로 '넋이 나간 채로' 뛰고 있었다.

미군부대의 독극물 한강 방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권력자에 의해 희생되는 약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화 속 딸을 잃은 아비의 모습을 보며 나는 흐느꼈다.

영화'의 말미에 그는 집 없는 소년을 구해 안고 이렇게 물었다.
'네가 현서(영화 속 딸 이름)와 끝까지 함께 있었니?'
그는 갈 곳 없는 소년을 키우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눈 내리는 세트장.
소년과 남자는 어두운 한강을 배경으로
실내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화면엔
참혹한 재난이 지나간 뒤의 팽팽하게 불안한 평화 속에
두 사람만 존재했다.

내게는 이 장면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경계를 서는 한 남자의 모습은
광장에서 연대하지 못하고 골방 속에 분노했던 이들의
외로운 싸움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언젠가 송강호는 인상적인 인터뷰를 남겼다.
“영화를 선택할 때 천만 관객을 동원하리라는 예감이 드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이런 취지의 답을 했던 것 같다.
“내 앞의 한 사람을 설득하는 힘과 
천만 명을 설득하는 힘은 같다.”

그의 말대로,
나와 같은 한 사람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기는 것과,
천만 명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차이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영화 ‘괴물’이 내게 보여준 지도 속에는
온 세상과 한 사람을 연결해 주는 아이가 있었고,
말도 안 되게 허술한 무기에 의지했으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이를 지키려는 남자가 있었다.

영화를 본 후 10년이 지났다.
약자들을 희생시키며 권력을 잡은 이들에 대한
냉소와 패배감 속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다엘의 손을 잡고 광화문 촛불집회에 서 있었다.

광장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 다엘에게 다가와 
과자를 쥐어주고는 미소 지으며 지나갔다.
서로의 존재를 고마워 하는 군중 속에 서게 된 것이 얼마 만인가. 

역사를 바꾸는 힘이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품에 깃든 단 한 명의 아이를 지키려 애쓰던
외로운 파수꾼들이 필요했다고 믿는다.

배우 송강호는 그렇게 내 마음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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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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