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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는 9월 말.
일본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는 또 다시 운동회의 계절이 찾아왔다.
일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운동회에 매번 참석하는 일이, 나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 오랜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아직 햇볕이 뜨거운 때에 아이들이 운동회 연습하느라 힘든 것도 그렇고,
아이들의 일률적인 움직임을 어른들은 구경만 하는 것도 그렇고..

처음 생각은 그랬는데, 무슨 일이든 장단점이 있는 법인지
막상 아이들은 이런 운동회를 통해 이전보다 부쩍 성장하기도 하고
또 연습을 즐기며 부모가 열심히 하는 자신을 보러오는 운동회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사실.
아이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 중의 하나는 역시 도시락!!
해마다 가중되는 부담감 속에 엄마는 나름 열심히 준비해 보지만,
다 싸놓고 보면, 매년 그 도시락이 그 도시락같은 건 왤까..;;
얘들아. 내년엔 엄마가 더 분발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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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다니는 학교 운동회 개막식(?) 때.

선생님 중 한 분이 트럼펫을 들고 나오셔서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곡을 연주해 주셨다.

아이의 말에 의하면 연습할 땐 정말 못 부르셨다고..;;

얘들아. 선생님이라고 뭐든 다 잘 하는 건 아니란다.

살짝 어설픈 듯한 선생님의 연주에 학부모들은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연주 실력보다 선곡 센스에 한 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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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달리기를 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이 든다.
빠른 아이는 빠른 대로, 느린 아이는 느린대로
모두가 입을 굳게 닫은 채 최선을 다해 달린다.
그 모습이 대견하고 참 아름답다.

매번 상위권 등수인 아이들은 어떻게 하든 1,2,3등 안에는 드는 결과에
늘 익숙할테고, 하위권 등수인 아이들은 늘 이렇게 스타트 라인에 서는 게
부담스럽고 떨릴 것이다.
아이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런 긴장과 비교의 순간을 얼마나 많이 겪게 될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하는 달리기같은 경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 큰아이는
올해도 뒤에서 세는 게 더 빠른 등수를 기록했다. 전날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다리가
아파서다, 연습 때는 더 빨랐는데, 식의 불평을 나중에 끝도 없이 늘어놓았지만
작년에도 올해랑 별로 다를 건 없었던 거 같은데..;;
우리 아이의 달리기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눈여겨 보게되는 달리기가 있다.
바로 아이 절친들이 달리는 순간.
같은반 00도, 옆집의 00도, 소꼽친구 00도 하나같이 1등 아니면 2등일게 뭐람.
아이가 이젠 좀 많이 큰 탓인지, 아니면 달리기 잘 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접은 탓인지
등수에 별로 신경쓰지는 않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드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 아인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거지?'
'1등이 있으면 꼴등도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1등한 아이 엄마들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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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들이 머리속을 마구 헤집고 다닐 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수많은 아이들 속에서 우리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식의 비교를
얼마나 많이 경험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고학년 정도가 되면, 남이 굳이 말로 표현하지않는 비교도 아이는 느끼게 된다.
운동을 잘 하는 아이, 남들 앞에 서서 큰소리로 응원가를 부르는 적극적인 아이,
리더쉽이 강한 아이, 인기가 많은 아이, 공부를 잘 하는 아이, 특기가 있는 아이,
얼굴이 이쁘거나 잘생긴 아이, 애교가 많은 아이 ...

이런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오로지 자기의 힘으로 학교생활을 잘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많은 힘과 용기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작년 때까지와는 다르게 올해 유독 그렇게 보인 이유는
5학년이 되고서 아이가 학교 내의 선배 학년으로서, 할 일과 책임이 더 많아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기 학년의 경기에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5,6학년들은 쉬는 내내 틈틈히 저학년들의 경기를 돕거나
운동회 진행의 일부분을 많이 맡아서 하고 있었다.

수업참관처럼 40,50분 잠깐 보는 것과는 달리
반나절 이상  학교에서 지내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 생활 열심히 하라고, 입버릇처럼 아이에게 당부하곤 했는데
부모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학교생활이 아이에겐
그리 만만하지많은 않겠구나..하는 실감이 들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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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저학년 때까지는, 고학년 언니오빠들이 너무 큰 존재같아서

아직 우리 아이에겐 너무 먼 미래같아서, 큰 관심을 가지질 못했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이제 고학년이 되고 보니, 그 또래의 아이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운동회의 마지막에 6학년 언니들의 체조경기는 너무너무 감동적이었다.


6학년 모두가 검은 티셔츠를 맞춰입고 맨발로 입장해서

지난 봄에 다녀온 수학여행의 추억을 단체 율동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작품같은 체조를 선보였다.

체격만 보면 초등학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아이들은 이제,

다가올 겨울만 지나면 중학교라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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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의 초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는 추억을 남기는 의미의 이 체조를 보며

학부모들의 눈물과 박수 갈채가 큰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속한 특수학급반의 6학년 아이들 몇몇도

이 체조에 함께 참여한다는 거였다. 조금 느리면 느린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선생님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 사는 다운증후군인 아이 얼굴도 보여 얼마나 뭉클했는지.


아직 초딩이라고 어리게만 대했던 13살 아이들의 대견함.

6학년 부모들은 이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아이들이 다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운동장을 한바퀴 도는데 우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아이들도 지난 6년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또 얼마나 많았을까.

좋았든 싫었든, 이제 이 학교에서 맞는 가을도 아이들에겐 마지막이다.


이런 6학년들의 모습을,

5학년 아이들도 묵묵히 지켜보았다.

우리 아이도 내년 가을에는 이 자리에서 6학년이 되어 같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1년 남짓밖에 남지않은 큰아이의 초등생활을 

좀 더 의미있게 채워나가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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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큰아이의 가방에는

운동회 소품으로 쓰였던 만국기의 국기 몇 장이 들어있었다.

5,6학년들은 국기 몇 장씩을 나눠서 빨아가는게 숙제란다.

이런.. 언니들은 마지막까지 고생하는 구나;;


이런 숙제도 있나?하는 생각도 잠시, 책이나 방송으로 자주 봤을 뿐

천으로 된 남의 나라 국기를 이렇게 만져보는 게 처음이라 무척 신기했다.

작은 아이는 하늘에 떠 있을 때는 자기 손바닥만큼 작았는데, 왜 이리 크냐며 또 신기해한다.

아이들은 아빠랑 낯선 국기들을 양손에 들고 펄럭여보기도 하고

옷처럼 몸에 맞춰보기도 하면서 한참을 놀았다.


각 국기의 나라를 맞춰보기로 했는데,

가운데 해 그림이 있으니 음.. 따뜻한 나라 국기일까?

이건 왠지 인도 국기같지않아??    이렇게 상상만 하다,

세계 지도를 찾아보기도 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하면서 하나씩 맞춰가는 기쁨을

온 가족이 함께 맛보았다.


아이와 함께 특별할 것 없는 이런 가정에서의 일상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하루였다.

아이가 고학년으로 커갈수록

부모의 도움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해야할 일들이 점점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고학년 아이들은 집에서도 잔소리를 이전보다 더 많이 들으며 지낸다.

우리집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차이  나는 동생이 있으니

"니가 지금 몇 학년이냐"   "낼모레면 중학교 간다"

이런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산다.


12살은 부모의 기대보다 늘 한발 느리고 게을러지는 나이다.

집에서만 보는 아이 모습은, 부모 입장에서는 늘 속이 터지고 답답한 게 일상이지만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고학년인만큼 많은 것들을 요구받고 해내야하는 시기일 것이다.

올해 들어 유난히 하교 후에 피곤해하고, 자기 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아이에게

나도 푹풍 잔소리를 일삼았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집 밖에서 할 일과 책임이 점점 많아지는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서 보내는 시간만큼은,

따뜻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부모가 배려를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어른인 우리가 밖에서 스트레스받는 만큼,

집에서는 마음편하게 보냈으면.. 하는 것처럼.


내일이면 다시, 똑같은 잔소리를 하게 될지언정

오늘 하루만큼은 아이의 학교생활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아이로 사는 것도 쉽지만은 않구나.. 나도 어릴 때 그랬지..

얘들아! 그동안 운동회 준비하느라 수고했다.

많은 것 배우고 잘 봤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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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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