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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 다니는 큰 녀석...

집 앞 삼거리에서 오전 9시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널널한 일정인데도

매일 버스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뛰어 내려간다.

도대체 여유있을때는 딴 짓 하다가 꼭 라디오에서 아홉시 시보를 알리면 그제서야

어떤 것을 챙겨달라느니, 깜박 잊은게 있다느니 하면서 내 애간장을 다 녹이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기껏 뽀뽀를 날리며 등 떠밀어 버스 정류장으로 내보냈더니 잠시 후에 헐레벌떡 뛰어 온다.

'엄마, 화채에 넣을 과일 안 주셨잖아요' 하면서 말이다.

아이고머니..

후다닥 과일을 내어 주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가 버렸다.

'어떻게 할래? 버스는 떠났는데...'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이 데려다 줘야겠구나 생각하며 차 열쇠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럼... 자전거 타고 갈께요' 하는게 아닌가.

자전거로? 학교까지? 정말? 이런 말들을 쏟아 놓기도 전에 아들은

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세워 둔 자전거위에 올라타더니 쏜살같이 언덕길을 내려가

골목 아래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열두살 난 사내녀석이 걸으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자전거로 가는 것이

뭐 그래 대수로운 일인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정말이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필규가 두발 자전거를 탄 것이 고작 지난해 부터 이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배우고서도 집 근처나 살살 돌아다니는 정도였다. 몇 번 아빠와 전철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지만 한마디로 보통 그 나이의 남자 아이들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자전거를 타온 시간이 적은데다가 자전거로 달려본 거리도 많지 않았다.

 

처녀시절부터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등산에, 암벽타기, 마라톤, 요가 까지

다양한 운동을 배우고 즐겼던 사람이다. 나같은 취미를 가진 남자를 만나 주말이면

함께 산을 오르고, 마라톤을 하는 그런 나날을 꿈 꾸었건만..... 내 남자는

고향 집 근처에 있는 설악산도 늘 눈으로만 오르는 사람이었고 주말이면 누워서 리모콘을

돌리는 일을 제일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도 아들을 낳으면 같이 캐치볼도 하고

공도 차 주겠지... 기대했건만,  아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는 것도 늘 내 몫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아들은 명랑했지만 운동보다는 책을 더 많이 보며 자랐다.

아파트를 떠나서 농촌으로 들어오면서 동네엔 어울릴만한 친구가 없었고

주말이면 서툰 농삿일과 집안일에 남편과 내가 매달리는 동안 아들은 주로

여동생과 놀거나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내곤 했었다.

그래서 일반 학교에 다녔다면 자연스럽게 접했을 농구나, 야구, 자전거 같은 것에

오래도록 서툴렀다. 그랬던 아들이 뒤 늦게 배운 자전거로 저 혼자 학교엘 간 것이다.

이건 정말 내게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0여분 쯤 후에 담임선생님에게 잘 도착했노라는 문자를 받았다.

땀으로 범벅되었지만 옷으며 나타났노라고 했다.

 

집 앞에서 학교 까지는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 산길이다.

최근에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를 하면서 자전거 도로를 같이 만들고 있었는데

며칠전에 그 도로가 다 완공되었던 참이었다.

아들은 오후 3시 수업이 끝나자 다시 자전거를 타고 금방 집 앞에 등장했다.

이글이글한 햇볕 속에서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얼굴이 온통 벌겋게 달아 있었다.

 

필규 10.jpg  

 

아... 열두 살 사내아이에게서 풍기는 그 진한 땀냄새라니..

매일밤 안아달라고 매달리는 철부지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진한 땀냄새 풍기는 상남자가 되었구나.. 감개무량했다.

 

샤워를 하면서 나를 부르더니 벌써 배에 복근이 나오기 시작했다며

으쓱거렸다.  장딴지 근육도 딴딴해졌다고 자랑이다.

'흠.. 정말이네.. 그럼, 앞으로도 매일 자전거로 학교 갈꺼야?' 했더니

'매일은 힘들어요. 이틀에 한 번씩만 할래요' 한다.

'어머나, 그 정도라도 완전 멋지지. 이거 아들 배에 조만간 씩스팩이

생기겠네? 엄마는 뱃살만 여섯팩인데..'

아들은 큭큭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도무지 철이 안 들것 같은 아들이었다.

사소한 것도 엄마에게 의지하고 부탁하고, 새로운 것을 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녀석이어서  왠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는 아들이었는데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녀석은 제 세상으로 쑥쑥 나가고 있었나보다.

어느날 갑자기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 버린 것 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고

예상하지 않을때 불쑥 성장한 제 모습을 보여주며 나를 놀래키곤 하니 말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조카녀석은 얼마전에 친구들과 자전거로 한강까지 다녀왔다며

자랑을 했었다. 그래, 그래... 내 아들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 모르지.

도대체 언제까지 엄마를 찾을거냐고, 여전히 매달리는게 지긋지긋하다고

불평하곤 했는데 오늘처럼 어느날 갑자기 아들은 내 곁을 서늘하게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막상 그러고 나면 아들보다 내가 더 오래 오래 서운할지도

모르겠다.

 

아아아. 주책맞은 엄마의 시나리오는 늘 너무 앞서간다.

겨우 학교 한 번 제 자전거로 다녀 온 아들을 보며 나는 벌써 아들이 자전거로

전국을 일주하는 그날까지 상상하며 홀로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고, 안 와도 상관없지만 아들은 매일 매일 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엄마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눈에 띄게

요란하지 않아도 아들은 하루 하루 자라고 있다는 것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문득 아주 오래 잊고 있었던 마라톤이 다시 하고 싶어졌다.

자전거 타는 아들 옆을 내가 달린다면 참 근사할 것 같은 것이다.

그래, 그래.. 그런 날도 오겠지.

상남자로 크는 아들을 보며 엄마의  시나리오는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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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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