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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지하도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어린이집,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 중,고등학생까지,
우리가 사는 동네의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지역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지하도의 벽을 장식한 것이다.

유명한 그림책에 나오는 한 장면을 협동화로 완성한 작품도 있고,
아주 어린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 모두의 작은 손바닥을 단풍잎처럼 물감으로 찍은 것을 큰 액자로 완성해 두었다.
초등생들의 레오리오니 <으뜸헤엄이> 협동화에는 아이들이 손가락 지문으로
작은 물고기들을 표현했는데 볼 때마다 참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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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를 걸어내려가 다시 지상으로 나오기까지는, 2,3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이곳을 지날 때마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감성과 손놀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걷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참 특이한 건
여러 아이들이 함께 그린 협동화든, 혼자 그린 그림이든
참 잘 그렸다.. 싶은 그림들 틈에 유아나 초등 저학년들이 그렸음직한
낙서같은 그림들도 함께 걸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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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 때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그리는,
어느 아이의 낙서장에도 몇 장은 있을법한 이런 그림들이
와..하는 감탄사가 날 만큼 잘 그려진 작품들 속에 함께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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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아이스러운 그림이라 귀엽지만,

어떤 시각으로 보면 좀 성의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이런 그림들을

1미터가 훨씬 넘는 크기의 액자에 넣어 동네 한 복판에 전시할 필요가 있을까.. ?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10년 넘게 아이들을 키우고 살면서

이제야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일본의 교육과 문화는 아이들의 그림에 대해 대체적으로

평가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인정과 공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 것 같다.

누가 봐도 잘 그린 그림들에 대해 감탄하고 인정하는 건,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렇게나 그린 듯한 그림에 대해서도 함부로 평가하고 폄하하기보다

그림을 그린 아이의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을 해 주는 게, 먼저라 여기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물론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에 대한 칭찬과 우열을 가르는 미술대회가 있긴 하지만,

초등학교 내에서 그림으로 아이들에게 상장을 주는 일을,

큰아이가 6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다.

미술 시간을 통해 그린 그림들은 모두 교실 뒷벽과 복도 벽에 그때그때 전시하는데,

좀 더 잘 그려진 몇몇 그림들은  미술실과 교무실 복도에 전시되는 게,

좀 더 특별하게 인정받는 유일한 방식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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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은 잘 그렸든, 못 그렸든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면서 어떤 해방감같은 걸 경험하게 해 준다.
아무렇게나 그은 점과 선에서 순수함과 자유, 자기다움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문득 슬퍼진다.

점 하나를 찍기도 전에, 그림 도구를 손에 잡기도 전에,
남이 어떻게 볼까.. 잘 못 그리면 어떻하나.. 두려움이 앞서
간단한 그림조차 시작해볼 마음이 거세돼 버린..
그래서 아이들이 그리는 단순한 점 하나, 선 하나만 봐도 부럽고 질투가 난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자기검열이 없던 그 어린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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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의 부담이 비교적 덜한 환경이라 그런가,

일본 아이들은 특별한 몇몇 아이들이 아니라도 대체로 그림을 참 잘 그린다.

잘 그린다기 보다, 정성들여 표현한다고 해야할까.


위에 있는 사진은 큰아이가 5학년 때 교실 복도에 있던 그림들인데,

잘 된 작품만 모은 게 아니라 반 아이들 30여명의 작품이 전부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시간에 자신이 직접 선택한 한자를 디자인한 그림인데,

아이들의 개성이 한 눈에 들어오고 성별의 차이가 뚜렷한 것이 재밌어

구경하는 내내 웃음이 났다.


그림 아래에는 이 글자를 선택한 이유와

어떤 점을 특히 표현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얼마전에 아기가 태어나 어린 동생이 있는 아이는

'사랑 애' 를 가족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고,

꽃과 겨울을 좋아하는 아이의 그림,

빨강파랑 두 가지 색만으로 심플하게 '불 화'를 그린 아이,

밤과 고구마를 좋아하는 아이가 그린 '밤 율'(우리집 딸^^) ...


획일적인 평가기준으로 좋은 그림과 아닌 그림을 나누지 않는 것,

우열을 가르고 상장에 집착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그림으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 않을까.


평가에 앞서, 다양한 감성과 개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있어야

아이들의 미술 재능이 제대로 꽃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뛰어난 그림책 작가와 만화가가 많이 배출되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유아기, 초등시절만이라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림그리기를

즐길 수 있는 교육과 문화가 필요하다.

평가보다 이해와 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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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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