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 11.jpg

 

아이를 셋이나 낳아서 기르고 있지만 '유치원'이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큰 아이도, 둘째 아이도 유치원을 안 다니고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치원 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도 없었고

관심도 안 주고 살았었다.  막내도 그럴 줄 알았다.

늘 엄마와 꼭 붙어서 지내다가 학교에 간 언니처럼 저도 그렇게

'엄마 유치원'에 다니다가 학교에 갈 거라고 큰소리치곤 했기 때문이다.

올 봄만 해도 막내의 생각은 바위처럼 변함없었다.

이모들과 어른들이 유치원 가면 선물을 많이 주겠다고 꼬셔도 끄떡 없었다.

그러던 막내가 별안간 유치원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당장 다니고 싶다고

조르는 것이다. 막내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꾸게 한 것은 친구들 때문이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언니 친구들과 자주 어울릴 기회가 생긴

막내는 언니 친구 동생들 중에 저와 나이가 같은 친구들과 금방 친해졌는데

그 친구들 대부분이 언니들이 다니는 학교의 병설유치원에 갈 것이라는

얘기를 듣더니 하루아침에 제 진로도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막내의 결심히 확고한 것을 확인하고 나자 나는 비로소 병설유치원 입학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막내는 셋째니까 '다자녀 우대 전형'으로 쉽게 입학이

되지 않을까... 안심하고 있었는데 착각이었다.

우리 동네엔 셋째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네 자녀와 다섯 자녀도 심심치

않게 있는 우리 동네에서 '셋째'라는 프리미엄은 굴러다니는 돌이나 같았다.

22명을 뽑는 6세반에 '다자녀 전형' 대상자는 딱 일곱명 뿐이었다.

 

유치원 입학원서에 붙이기 위해 난생처음 이룸이의 증명사진도 사진관에서

찍고 설레는 마음으로 접수를 하러 갔더니 접수 번호가 30번이다. 우리 뒤로도

줄줄이 들어선다. 이런, 이런... 나중에 알고보니 60명이 넘었단다. 아이고...

 

유치원 추첨하는 날, 운동장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걱정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떨어지면 그냥 내가 데리고 있으면 되지.. 어짜피 처음부터 보낼 생각도

없었는데 뭐... 하는 마음으로 애써 태연한 척 강당으로 들어갔더니

교실 두개를 합친 강당이 부모들로 꽉 차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엄마들마다 '언니는 유치원 안 보낸다더니, 보내게?

그럼 언니도 경쟁자잖아' 하며 아우성이다.

그러고보니 똑같이 세 아이 키운다는 공통점으로 언니,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던 많은 엄마들이 다 경쟁자가 되어 있었다.

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병설유치원에 세째를 보내면 아이들 챙기기가

한결 수월해지기 때문에 다들 꼭 보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갑자기 나도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왠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추첨에 떨어지면 너무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추첨은 상자속에 넣은 탁구공을 꺼내는 방식이었다. 흰색은 합격, 검은색은 

불합격이다. 7세반 결원 일곱명을 먼저 뽑았다. 스무명 넘는 지원자의 부모들이

딱 일곱개인 흰 공을 소망하며 차례로 나와 상자속에 손을 넣는데

검은공이 연이어 나오자 강당안은 안타까운 탄성으로 가득했다.

쌍둥이 엄마는 검은공을 뽑고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쌍둥이들은 한 번 추첨에서 흰공을 뽑으면 둘 다 합격이고 검은공을 뽑으면

둘 다 불합격이었으니 마음이 얼마나 더 속상했을까.

 

"언니, 흰공을 뽑을 수 있는 그런 요령, 뭐 그런거 없을까?"

옆에 앉은 윤지 엄마가 물었다. 네 아이를 키우는 그녀는 셋째를 병설유치원에

넣어야 그나마 어린 막내 거두기가 편해 지는 형편이었다.

"글쎄.. 나도 뭐 태어나서 처음 이런거 해보는데 요령을 알리가 있나..

그런데 얼마전 한겨레 신문에서 봤는데 경기도의 어떤 병설유치원에서는

흰공과 검은공을 촉감으로 구별할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서 비닐장갑을 끼고

뽑았다더라. 흰공은 그대로 쓰지만 검은공은 아무래도 도색을 한 번 한거니까

촉이 좋은 사람은 미세하게 그 차이를 구별 하나보지"

"어머, 그래? 그런 알짜 정보를 다 알고, 언니 대단하네?"

단지 매일 신문을 읽는 것 뿐인데 그녀는 나에게 퍽 감탄한 눈치였다.

"그리고.. 검은색은 빛을 흡수하는데 흰색은 반사하잖아, 그러니까 혹시

흰색공이 아주 조금이라도 더 서늘하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더 온기가

느껴지는 쪽이 검은공일 수 있어"

"세상에.. 언니는 그런걸 어떻게 다 알아?"

"그건 과학 상식이거든? 누구나 다 아는?"

"나는 그런거 몰라, 어쨌든 알았어. 중요한 정보를 얻었으니까 잘 해볼께,

근데 언니랑도 경쟁해야 하는데 우리 둘 다 흰 공 뽑을 수 있을까?"

우린 추첨이 이루어지는 동안 뒷자리에 앉아 이런 수다를 꽤나 진지하게 떨어가며

합격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있었다.

 

마침내 6세반 추첨이 시작되었다.

먼저 '다자녀 전형' 추첨이었다. 일곱명의 자리에 지원한 셋째 아이는 모두 열 여덟명

이었다. 일곱개의 흰공과 열 한개의 검은공이 들어간 상자가 우리 앞에 놓여졌다.

긴장하고 있는 엄마들과 그 곁에서 동생의 합격을 바라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보고 있자니 애 키우는 일이 이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연속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마음이 잠시 조여왔다.

 

감상에 빠질 사이 없이 추첨은 시작되었다.

나보다 먼저 접수한 엄마들부터 추첨을 시작했는데 세 명 연속 검은공을 뽑았다.

검은공이 순식간에 8개로 줄었다.

확률은 이제 일대 일이다. 촉이고, 온기고 뮈고 생각할 겨를 없이 내 순서가 되어

상자에 손을 집어 넣었다. 달그락 달그락 상자 안의 공을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강당안에 울려 퍼졌다. 집었다 놓았다 하다가 공 하나를 꺼냈다.

'합격입니다'

내가 꺼낸 공은 흰색이었다. 아.. 다행이다.

강당안에 축하와 부러워하는 탄성이 흘렀다. 비로소 다리가 탁 풀렸다.

처음 겪어본 유치원 추첨은 생각보다 긴장되고 떨리는 일이었다.

 

1차 추첨에서 탈락한 셋째 아이들은 일반 아이들과 다시 추첨을 하고 거기서 떨어진

아이들은 대기번호를 추첨했다. 붙은 사람들의 환한 얼굴과 떨어진 사람들의

속상한 얼굴 사이에서 맞벌이 하느라 추첨장에 올 수 없는 부모들을 대신해서

참석한 조부모들이 검은공을 뽑고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는 모습이 가장

안타까왔다. 키워주는 것도 감사한데 이런 책임까지 지게 하다니..

 

남편한테 톡으로 합격소식을 알렸더니

'아싸!' 하며 덩실거리는 토끼 그림이 대번에 올라온다.

놀이터에서 유치원 추첨 하는 부모들을 따라 온 다섯 살 또래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던 이룸이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너무나 좋아한다.

"온이랑, 다성이랑, 정우, 지원이, 슬기.. 니가 좋아하는 친구들도 다

합격이야"

"와, 엄마 병설유치원 빨리 다니고 싶어요!"

 

그날 이후 이룸이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 유치원에 뽑혔다요? 우리 엄마가 흰 공을 뽑았거든요.

흰공은 합격이라는 뜻이래요" 하며 자랑을 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검은공을 뽑았더라면 어땠을까... 아찔하다.

 

한동안 동네를 들썩이게 했던 병설유치원 추첨은 많은 사연들을

남기고 지나갔다.

첫 아이와 둘째 아이 모두 이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막내는 추첨에

떨어져서 다른 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는 소식부터

대기후보였는데 합격한 아이들 몇몇이 다른 유치원을 선택하는

바람에 합격이 되었다는 소식까지 다양한 뉴스들이

동네는 달구었다.

 

신문을 보니 어떤 신도시 병설유치원은 경쟁률이 10대 1을 넘은 곳도

있다고한다. 경쟁이 싫어서 도시와 아파트를 떠나 논과 밭이 있는 곳으로

왔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도 유치원부터 경쟁은 피할 수 없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여간에 유치원 추첨은 지나갔고, 합격한 이룸이는 빨리 여섯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매일 언니와 글 쓰기도 연습하고 옷 벗고 입는 것부터 일상생활의 모든

일에서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 이 정도는 혼자  해야된다고 말하면

벌떡 벌떡 스스로 해 내고 있다.

내년에는 많은 변화가 올 듯 하다.

애 키운지 13년 만에 하루 반 나절씩 아이들  없이 지내게 될 일이

제일 기대된다.

 

이제 병설유치원 원생이 될 막내 이룸이,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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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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