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추운 건 당연하지만, 올 겨울은 유난히 더 춥게 느껴진다.
몸으로 느끼는 추위도 그렇지만, 날마다 들려오는 어마무시한 뉴스들에 영혼까지 얼어버릴 것 같다.
같은 일이라도 추운 겨울날 겪는 일은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법.
사회 구석구석에서 약자들이 겪는 학대와 설움이 남일 같지 않아 한동안 우울의 늪에 빠져 살았는데
뭐든 좋으니 위로라도 받고 얼른 정신차리고 싶어, 이리저리 찾던 중 보게 된 것이
나영석 피디의 <삼시세끼>였다.

아이들이 다 잠든 겨울밤, 뜨거운 차 한 잔을 준비해 따스한 담요를 덮고 구경하는

시골의 겨울 풍경과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큰 위로를 안겨주었다.

이 프로 덕에 나는 잠시나마 무기력을 떨쳐내고, 겨울방학을 시작한 두 아이의 삼시세끼를

그럭저럭 잘 챙겨주었고, 김장같이 큰 부엌일도 혼자서지만 즐겁게 치를 수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가 <삼시세끼>에 나온 여러 음식 중에 가장 해먹고 싶었던 건, 역시 수수부꾸미였다.

밭에서 고생고생하며 직접 거둔 수수를 방앗간에서 탈곡해, 가루로 만들어 반죽하고

팥앙금을 듬뿍 넣어 가마솥 뚜껑에 지져먹는 장면은 화면으로만 보기엔 너무 괴로울 만큼 맛나보였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보면,

자연스럽게 함께 먹고 싶은 사람이 떠오른다.

아이들, 가족, 친구, 이웃..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는 행복,

그 순간을 만끽하고 싶은 게 아닐까.


DSCN4171.JPG

얼마전, 생협육아모임에선 올해 첫 요리로 된장을 담았다.

벌써 3,4년째 하다 보니 몇 년째 해오는 엄마들은 능숙하게 삶은 콩을 다룬다.

올해 처음 참가한 서른이 될까말까한 젊은 아기 엄마들은 만들면서도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이게 정말 된장이 되나요??"

"응^^ 우리도 첨엔 다들 그랬어. 익히느라 보관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랬지."

또 다른 엄마가 한 마디 거든다.

"걱정 안 해도 돼. 이렇게 다 같이 만드니까 망해도 다 같이 망하는 거잖아."


정말 그렇다. 몇 년째 하는 거니까 혼자서도 충분히 담을 수 있지만

같은 일이라도 이렇게 함께 하니, 힘도 부담도 덜 든다.

신기한 일이다.


DSCN2114.JPG

그리고. 우리들의 된장은 망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재료를 써서 만든 두 가지 맛 된장은 골라먹는 재미까지 선사하고
가끔은 둘을 섞어 맛을 내는 콜라보레이션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작년에 담은 된장의 비주얼과 맛을 확인한 신입 엄마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표정이었다.

DSCN4172.JPG

된장을 만드는 틈틈이 아이들과 먹을 점심 준비를 했다.
오늘 메뉴는 갈은 돼지고기에 소금후추, 두부 으깬 것을 넣어
양배추 잎과 교대로 층층이 쌓아 쪄서 먹는 아주 간단하지만 맛있는 요리다.
처음 우리 모임을 시작할 때, 요리에 정말 자신이 없어서 들어왔다는 엄마가
만든 요리인데 부엌육아 3년하고 나니, 이런 창작요리가 이젠 가능해 졌단다.
조리실 창문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
겨울 햇살과 초록색 양배추잎, 갈은 고기의 조화가 너무 이쁘다.
치매가 두려우면 요리를 하라더니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감각을 총동원할 수 있는 요리는 아무래도 남는 장사같다.

DSCN4174.JPG


한국요리 담당인 나는 잡채를 10인분 넘게 만들었다.

채소 써는 일, 당면 삶는 일, 후라이팬에 볶는 일은 다른 엄마들이 다 거들어주고

나는 양념만 전담해서 만드니 커다란 중국식 후라이팬에 산더미같은 잡채가

20,30분만에 뚝딱 완성!

집에선 귀찮아서 잘 시도하지 않는 복잡한 요리들이

왜 다 같이 하면 이리도 쉽고 간단하게 느껴질까.


DSCN4178.JPG

1년치 먹을 저장식을 담그고,
어른아이 합쳐 20명에 가까운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엄마들이 여유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이들 때문이었다.

초등 고학년부터 이제 갓 돌을 넘긴 아기들까지,

큰아이들이 동생들을 돌보고 함께 놀아주며,

또 틈틈이 엄마들이 돌아가며 누구네 아이든 한번씩 안아주고 챙겨주는데,

그런 '느슨한 돌봄' 만으로도 너무 잘 지내주는 덕분이었다.


각자 집에서 아이 하나 둘, 혼자 돌보며 된장담기&점심차리기를 같이 한다?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말 거 같다. 그 까짓 된장, 사먹고 말지.


아무튼 이렇게, 2015년 시작부터 된장담기 미션을 무사히 마쳤다.

주말 한나절 조금 분주하게 움직였을 뿐인데 1년치 된장이 완성되고

밥과 된장국과 갖가지 재료들이 풍성한 반찬으로 아이들 잘 먹이고

남은 음식들은 저녁반찬용으로 야무지게 나눠챙겨 올 수 있었다.


청소와 빨래는 하루이틀 미룰 수 있다 해도

아이를 위한 끼니만들기와 식사시간은 그럴 수가 없으니

육아와 가사의 가장 큰 숙제이자 스트레스다.

아이들 급식먹이는 시간이 지옥같다는 어린이집 교사들의 하소연처럼

어린 아이와의 평화로운 식사시간은 가뭄에 콩나듯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다양한 식성과 음식 취향을 가진 아이들을 돌보는 제3의 손길들이 좀 더 많았다면,

음식 자체 외에도 좋은 사람들, 행복한 분위기에서 나오는 관계의 조미료로 아이들이

좀 더 식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먹이는 일이 노동으로만 다가오지 않을텐데..


아이와의 삼시세끼가 좀 더 행복해 지려면,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나눠먹는 일에

좀 더 시간과 마음을 써야하지 않을까 싶다.

삼시세끼에서는 어릴 적 증조할머니께 배운 '손만두'를

출연자 모두가 힘을 모아 만드는 장면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릴 때는 몰랐던 이야기들

나이가 들어서야 알 수 있는 이야기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음식을 해주는 사람일 때 알 수 있는 것들


추운데다 우울한 소식들로 힘겨운 요즘같은 겨울,

고단한 육아에 지친 부모들이 모여 '이제야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소박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좀 더 자주 만들 수 있음 좋겠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310857/672/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1265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육아의 가치와 고됨을 학교에서 배운다면 [14] 케이티 2015-01-22 9306
1264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어린이집 재롱잔치, 나도 이제 부모가 된건가 imagefile [2] 홍창욱 2015-01-22 10047
1263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마흔 여섯살의 공부 imagefile [6] 신순화 2015-01-21 16664
1262 [최형주의 빛나는 지금] 바지 열 벌의 재탄생 imagefile [10] 최형주 2015-01-21 9015
»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아이와의 삼시세끼, 좀 더 행복해지려면 imagefile [8] 윤영희 2015-01-18 12388
1260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 우리는 모두 용기를 내서 살고 있는 것이다 imagefile [25] 안정숙 2015-01-17 12079
1259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내보내기 위해 잠깐 품는 것 [14] 케이티 2015-01-15 9024
1258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결혼 뒤에도 야동, 마늘 먹어야 되나 imagefile [1] 홍창욱 2015-01-15 31518
1257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밥과 밥 사이, 하루가 간다 imagefile [4] 신순화 2015-01-14 11630
1256 [윤은숙의 산전수전 육아수련] 일과 육아 사이, 손오공을 꿈꾸며 imagefile [6] 윤은숙 2015-01-13 11401
1255 [최형주의 빛나는 지금] 앗! 이 소리는? imagefile 최형주 2015-01-09 7302
1254 [김은형 기자의 내가 니 엄마다] 나는 '미생'엄마다 imagefile [1] 김은형 2015-01-08 12006
1253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가족끼리 상장, 상상 그 이상 imagefile [11] 신순화 2015-01-07 18837
1252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두 살 아이의 말 배우기, 반갑고도 속상한 이유 imagefile [13] 케이티 2015-01-07 11715
1251 [김명주의 하마육아]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 건지기까지 imagefile [4] 김명주 2015-01-07 15176
1250 [양선아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겨울엔 역시 눈 영화와 눈 썰매 imagefile 양선아 2015-01-05 9923
1249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한방-각방 쓰기, 육아와 일 사이 imagefile 홍창욱 2015-01-05 13790
1248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두 아이의 진짜아빠 만들기’를 열며 imagefile [1] 홍창욱 2015-01-05 7663
1247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로렌조와 케이티 다르지만 같은 이름 imagefile [6] 케이티 2015-01-01 15273
1246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기억하자, 기억하자.. 다시 기억하자 imagefile [6] 신순화 2014-12-31 9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