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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연말, 영화 <로렌조 오일>을 보았다. 20년도 더 전에 엄마와 함께 한 번 본 적이 있는 영화다. 20여년 전이면 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으니 영화의 자세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그저 아픈 아이의 실제 투병생활과 그 부모의 노력을 그린 영화라는 것, 그 부모가 발견한 치료물질의 이름이 '로렌조 오일'이라는 것만 생각났을 뿐이다. 그 영화를 20년 만에 다시, 이번엔 남편과 함께 봤다. 며칠 뒤면 생애 세 번째 MRI를 찍게 될, 우리 아이 케이티를 안방에 재워놓고서.


영화를 보는 내내, 참 많이 울었다. 다섯 살 생기 넘치던 꼬마 로렌조가 하루가 다르게 신체기능을 잃고 꺼져가는 모습을 보면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케이티는 다행히 다리 한쪽의 문제일 뿐,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삶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때때로 마치 그 다리가 케이티의 삶을 모두 망쳐놓진 않을까, 이 몹쓸 병이 아이를 끝내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을까 불안할 때가 있다. 혈전이 자꾸 생기다 보니 잘못되면 폐색전증이 와서 죽기도 한다는데, 다리 길이 차이가 심하게 나면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데. 케이티가 정말 그렇게 되면 어쩌지, 하면서. 때문에 출산 후 첫 몇 달은 무섭고 슬픈 꿈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아이 다리와 팔이 모두 쭉쭉 길어지다 끝내 폭탄처럼 팡, 터져버리는 장면을, 또 어느 날은 다리 통증이 심해 울기만 하는 아이를 붙들고 나도 엉엉 우는 장면을 꿈 속에서 만났다. 내가 이런데,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어 죽음으로 내달리고 있는 아이를 보아야 했던 로렌조의 부모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까.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내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로렌조 부모의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끈질긴 지적 호기심과 남다른 의지였다. 로렌조의 부모는 당시 의학계에서 임상실험 중이던 식이요법의 한계를 깨닫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스스로 각종 자료를 뒤져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집에 전담 간호사를 두고 간병을 하는 한편으로, 부부는 자나깨나 논문을 들여다보고 의료계/학계 전문가들을 모아 토론을 벌이며 조목조목 이 거대한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의학자료전문 도서관에 틀어박혀 의/약학 전문 자료와 동물실험 결과를 뒤져가며 그야말로 미친듯이 공부한 부부는 마침내 이 질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특정 지방산의 생성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는, 이른바 '로렌조 오일'을 발견한다. 로렌조의 아빠가 도서관 한 켠에 틀어박혀 클립 뭉치를 가지고 사슬 구조를 만들어가며 지방산의 특성을 알아내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의학/생물학 전공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 아들을 살리려는 의지? 아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극 중 로렌조의 부모는 자주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때마다, 특히 로렌조의 엄마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한번이라도 더 껴안고 이야기하고 눈 맞추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부부는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그건 아마 이 끔찍한 병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나 고통 받아야 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왜 평범한 사람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을 것들이 내 아이에겐 생명의 위협이 되는지, 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조금이라도 막을 방법은 없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가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멈출 수 없었던, 아이의 죽음이 성큼 엄습해 오는데도 꺼지지 않던 그 질문들, 그 호기심. 그것이 마침내는 아이를 살리는 길로 이어진 거다. 이 '끝없이 질문하기'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의지, 그것은 결코 로렌조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부부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로렌조를 일찍 보내게 되더라도, 그 이후에 있을 또다른 로렌조들을 위해 계속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 부부의 심정을, 그 고집스러움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 역시 케이티의 진단명을 듣고 난 뒤로 틈틈이 공부를 하고 있다. 케이티의 발에 통증이 찾아와도, 허리, 배, 엉덩이, 다리 곳곳에 불룩한 덩어리가 뭉쳤다 사라져도, 몸 곳곳에 번져 있는 붉은 얼룩 위에 물집이 생기고 출혈이 생기고 딱지가 졌다 떨어져도, 그게 정확히 무엇 때문에 생기며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우리 부부는 늘 질문을 안고 산다. 처음엔 '대체 케이티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이건 왜 생기는 걸까' 하는 정도의, 범위가 넓은 질문이 많았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이 병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지나면서 우리의 질문은 점차 구체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멍이 드는 것과 혈전이 생기는 것은 뭐가 어떻게 다른걸까? 림프마사지는 왜 이런 순서로 하라고 하는 걸까? 다리 뼈가 과도하게 길어지는 건 무엇과 관련이 있는 걸까 등등. 그러다보면 우선 사람의 몸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먼저 알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집에 생물학/생리학/해부학 등의 관련 기초서적을 구비해 두고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다. 110년 전에 처음 명명된 이후 지금까지 이렇다 할 연구 결과나 치료법이 나와 있지 않은 이 특이한 질환은 우리 부부에게 던져진 일생의 숙제나 다름없다. 그리고 우리의 공부 역시, 결코 우리 아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우리 아이와 같은 병을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고, 슬프게도 우리 아이와 그 아이들 모두 답이 없는 고통 속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한국에 있는 KT 환자/보호자들을 위한 온라인 서포트 그룹을 하나 만들었다. 어느새 서른 명이 훌쩍 넘어버린 회원수를 보면, 한편으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국내 환자 수가 많아 봐야 백 명 단위에 불과할 희소질환이기에 국가적인 관심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의료진들의 연구나 임상실험, 치료법 개발을 기대할 수도 없는데 자꾸 여기저기서 새로운 케이티들이 태어나고 있는 것이 못내 속상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케이티의 엄마로서 지금 내가 시작한 이 일이, 나중에 올 다른 케이티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원천적으로 케이티의 탄생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 앞으로 태어날 다른 케이티들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덜 힘들게 살 수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새해에도 조금 더 부지런히 공부해 보려고 한다. 의사들은 교과서에서나 봤을 이 병, 나라도 좀 더 이해하고 있어야 우리 아이들이 아플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 환자 수가 적어 의사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면, 내가 더 많이 공부해서 의사들에게 자꾸 물어보며 그들을 자극할 필요도 있다. 그러다보면 치료법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한 가닥 실마리라도, 모든 케이티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작은 방법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인도 치료법도 없는 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엄마가 된 후, 아픈 아이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울게 된다. <로렌조 오일>을 다시 보면서 그렇게 울었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로렌조와 케이티의 상황이 많이 다른데도, 그 아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내 아이가 그런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다. 사실 나는 어릴 때 제법 허약한 체질의 아이여서 잔병치레를 좀 했고, 폐렴에 가까운 증세로 한 달 가량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서 어릴 적부터 아픈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의사나 간호사 같은 전문 직업을 가질 생각은 못 해봤지만, 언젠가 여력이 되면 아픈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그랬던 내가 아픈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으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지만 이게 내 운명이라면, 나는 이 운명을 기꺼이 지고 꿋꿋이 걸어가고 싶다. 때로는 비틀거릴지라도,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운명을 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자꾸 찾아내어 말 걸고 손 내밀어 함께 공부하고 같이 목소리 높이고 싶다. 앞으로도 이어질 수많은 케이티와 로렌조, 또 다른 아픈 아이들 모두를 위해서. 2015년 새해, 나는 더욱 바빠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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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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