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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가, 환자가 뒤죽박죽 쏟아내는 그 이야기를 꿰 맞출 수 있는가, 환자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확인하고 평가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들이 각 층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에 감화될 수 있는가." 이것은 미국의 한 의대 교수가 꼽은, 의사들이 갖춰야 중요한 덕목들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느 책의 서문에서 이 한 줄을 읽고 단번에 이 책을 집어 왔다. 케이티와 함께 살며 무수히 만나 온, 앞으로도 수 없이 만나게 될 사람들이 바로 의사이기에 어쩐지 관심이 갔다.


이 책은 일종의 문예 선집인데, 한국어로 출판한다면 ‘의학도가 반드시 읽어야 할’ 이라는 부제를 붙이기 좋은 책이다. 병원에서 흔히 겪을 법한 일들을 다룬 단편 소설과 에세이, 시를 여기저기서 모아놓은 것인데, 어떤 작품들은 의사/간호사이면서 글쓰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작품이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이 문예 선집을 엮은 쪽에서는 의대 교육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문학 교육이라고 역설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야기를 읽고 교감하는 ‘문학적’ 능력이 의사로서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교감하며 이해하는 능력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내가 특별히 운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껏 여기서 만난 의사들은 대부분 한국의 의사들과 많이 달랐다. 이 곳 의사들은 증상 설명-진단-처방의 그 각 단계마다 ‘이야기’와 ‘질문’이 끼어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항상 남겨놓고 있다. 임신 기간 동안 나를 봐 준 조산사는 정기 검진 때마다 나의 신체적인 변화 뿐 아니라 감정적, 정서적인 안부를 챙겨 물었다. 갑작스럽게 역아가 되어버린 아이를 꺼내기 위해 수술을 하는 내내 내 담당 조산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고,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수술 절차를 하나씩 설명해가며 내 동의를 구했다. 케이티의 오른 다리를 한눈에 알아보고 진단을 내린 신생아담당의사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 평상복 차림으로 내게 와 KT에 대해 찬찬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케이티를 데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수첩 가득 질문을 적어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 듣고 올 수 있는 것도 의사들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다는 건, 그리고 상대방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을 이해하고 그에 기꺼이 대답해 줄 자세가 되어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특히 의사는 전문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으로서,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누구보다도 더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케이티를 데리고 병원에 다니는 일이 괴롭지만은 않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혈관전문의사는 내게 최신 논문을 프린트해서 쥐어주며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고, 내가 수첩에 적어 간 질문을 빼놓지 않고 다 했는지 재차 물어보며 챙겨준다. 내가 한국 KT 환자들과 함께 서포트 그룹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기뻐했고, 케이티가 신는 예쁜 맞춤 신발을 다른 환아들에게도 소개해주고 싶다며 내게 그 회사의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가기도 했다.


이 곳 의사들에게서 나타나는 그런 태도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물론 이 곳 의사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분명 한국과는 다르다. 그 실마리 중 하나는1996년 미국의과대학교협회(AAMC)가 시작한 한 프로젝트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AAMC에서는 의대 졸업생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로 ‘이타심’, ‘지식’, ‘기술’ 그리고 ‘책무’를 꼽았는데, ‘이타심’을 정의한 대목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의사는 언제나 열과 성을 다해, 정직하게 행동해야 하며 환자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환자를 한 사람으로서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책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의사는 환자의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고 개선하기 위해 다른 의사/의료 전문가와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 (중략) . . . 특히 사회적 약자의 건강권을 옹호해야 한다.” 이런 덕목과 가치들을 의대생을 길러내는 교육현장에서 비중 있게 가르친다면, 아무래도 의료현장 전반의 분위기가 그에 맞춰지게 마련일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인데도, 한국의 의료현장에서는 여전히 이런 의사를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이십대 초반에 치과를 다니면서 ‘지금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지 않으면 50대가 되기 전에 틀니를 하게 될 것’이라는 으름장을 들었는데, 당시 치과에서는 치료를 종용하기만 했지 평소에 어떻게 관리하면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언젠가 감기몸살이 너무 심해 몸을 가눌 수 없어 엄마와 함께 찾은 동네 내과에서는 엄마가 동석한 자리에서 의사가 내게 임신 가능성을 물은 적도 있다. 치료 방법과 과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라 하더라도 환자의 진술을 의심하는 어투로, 환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던져대는 질문은 전혀 달갑지 않다는 걸, 아니 매우 불쾌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케이티처럼 희소질환을 앓는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더더욱 기가 막힌다. ‘KT는 치료법이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라’는 말은, 아무리 그것이 의학적으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환자와 보호자에게 대못을 박는 말이다. 앞으로 어떤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그 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도 말해주지 않은 채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는 의사들도 있다. KT 같이 정형외과, 진단의학과, 피부과, 방사선과 등 여러 과의 협진이 중요한 질환에 대해서도 의사들은 자기 분야에 대한 조치만 내릴 뿐 다른 과에 연결시켜주는 일이 드물다. 10만분의 1확률인 KT, 의사들도 잘 모른다는 거 우리도 다 아는데 모르면 솔직히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모르면 같이 좀 알아봐주면 될 것을 꼭 그렇게 귀찮은 티 내가며 우리를 돌려보내야 하는 걸까? 물론 알고 있다. 대다수의 의료현장이 얼마나 숨가쁘게 돌아가고 일반 의사/간호사들의 노동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리는 또 안다. 얼마나 많은 의료현장이 ‘돈 되는’ 질환과 기술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그 속에서, 완치법은 없고 정기적인 관찰이나 하며 증상이 생길 때 그에 따른 미봉책밖엔 쓸 수 없는 많은 희소질환 환자들은 기댈 곳이 없다.


최근 들어 한국의 몇몇 의대에서도 의대생들에 대한 인문학 교육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다행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우리 모두가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중하고 서로에게 정직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갖추어야 한다. 돈과 외모, 능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모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길러내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아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아이, 나의 지식과 재능이 온전히 내 능력만으로 갖춰진 게 아님을 아는 아이,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때로는 그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아이. 그런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이 지금 우리 어른들의 책무다. 그래서 머지않은 미래에는 우리가 그렇게 길러낸 아이들이 의사가 되고 판사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에서라면, 그 때에야 비로소 '잊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이 헛된 구호가 아니었음을 자신할 수 있으리라.


작년 이맘 때, 케이티는 KT 증상으로 인한 발 통증으로 한창 힘들었다. 그 후 1년 내내 잘 지내던 아이가 간밤에 갑자기 다리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괜찮다고 한다. 아이도 4월 16일인 걸 알았던 걸까. 하필 이 날 갑자기 아프다고 하는 아이를 보며, 어쩌면 이 아이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남다른 게 아닐까 하는 조금은 황당한 생각을 해 보았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총기 사고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던 날 태어난 이 아이는 어쩌면 그런 운명 때문에 자신의 아픔 뿐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도 깊이 공감하는 아이로 자라기가 더 쉬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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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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