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봐, 케이티가 좋아하는 꼬까꼬까 있네? 저기 가면 에요에요 붐붐이 있어!"


꼬까꼬까, 는 아이의 말로 깃발이고 에요에요 붐붐, 은 소방차다. 사이렌 소리만 들리면 '에요에요 붐붐!' 하고 창가에 들러붙어 엠뷸런스, 소방차, 경찰차 등 소리 나는 자동차를 눈으로 좇기 바쁜 케이티에게 소방서를 구경시켜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3월 말인데도 여전히 아침 기온이 영하권인 날씨 탓에 갈까 말까 제법 망설였는데, 다행히 소방서가 버스 노선 가까이에 있어 눈 딱 감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작정을 하고 나섰는데도 버스에서 내려서 소방서까지 걸어가는 5분 동안은 후회막급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흐린 날 아침이어서 아이가 걸어서 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걷는 게 두려워 엄마 다리에 얼굴을 묻고 서서 꿈쩍도 않는 아이에게 저 멀리 소방서에서 펄럭이는 미국 국기를 가리키며 어르고 달랬다.


겨우겨우 아이를 달래 소방서 안에 들어서니 이미 실내는 우리 동네 엄마 모임에서 나온 엄마들과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들 아침부터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추워도 억지로 나온 것 같았다. 퀭한 얼굴의 엄마들과 달리 마구 떠들며 기고 걷고 뛰는 아이들 틈새로 두 명의 젊은 소방관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건 처음이라 긴장된다며 너스레를 떨던 두 소방관은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내기 위해 소방관들이 쓰는 거실/부엌/침실 공간을 먼저 소개했다. 세 팀의 소방대원들이 교대근무를 하기 때문에 냉장고도 팀 별로 하나씩 있다는, 다른 팀 냉장고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지만 꼭 한 번씩 그런 일이 생겨서 예전에는 냉장고마다 자물쇠를 채우기도 했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에 너댓 살짜리 큰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한 번 소방서에 나오면 24시간, 48시간 연속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잠도 소방서에서 자는데, 파자마 파티 할 때처럼 엄마 없이(이 대목에서 한 사람은 엄마들을 향해 '아내 없이'라고 작게 속삭였다) 친구(동료)들과 있는 것이어서 재미있다는 얘기에 엄마들도 깔깔 웃었다.


소방대원들의 대기 공간에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여러 벌의 소방복과 장화가 누군가 입었다 벗은 모양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잠을 자다가도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이것들을 그대로 다시 챙겨 입으며 벽에 붙은 동네 지도를 보고 출동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소방차를 향해 뛴다고 했다. 그렇게 소방대원의 설명에 따라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소방차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벌써 신이 나서 소방차를 향해 달려드는 아이들을 진정시켜 겨우 한 자리에 앉혀놓고, 본격적인 안전교육 내용을 들었다.


소방대원들은 엄마들을 향해 불이 날 때를 대비해 평소에 미리 아이들과 상황을 가정해보면서 대피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집 밖의 한 지점을 정해 두고 불이 나면 빠른 시간 내에 그 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주지시키고, 혹시 아이가 먼저 나와 혼자 있게 되더라도 다시 불이 난 곳으로 가지 않고 이웃집에 가서 도움을 청하도록 얘기해 두어야 한다는 거다. 여기까지는 소방대원들이 엄마들에게 당부한 내용이고 요 다음부터가 아이들을 위한 설명이었는데,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최대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쉽게 설명해주는 소방대원들의 노력 때문이다.


"얘들아, 너희들 집에 개나 고양이 많이 키우지? 너희가 그 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불이 나면 그 애들도 찾아서 같이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거야. 하지만 동물들은 불이 나면 위험을 빨리 알아차리고 도망치는 습성이 있어. 그러니까 너희도 얼른 거기서 빠져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해."


"불이 나면 엄마 아빠와 미리 얘기해 두었던 그 곳을 향해 얼른 나가야 하는데, 혹시 그게 어렵다면 이렇게 엎드려서(직접 손과 무릎을 땅에 짚어 자세를 보여주며) 기는 자세로 소방대원들을 기다려야 해."


"자, 이제 소방대원이 어떤 모습으로 너희를 구하러 가는지 보여줄게. 이 아저씨 좀 봐. 지금 소방복을 입고 헬멧을 썼지? 이 아저씨는 등에 산소통을 메고 있는데, 불 난 곳에 들어갈 땐 아저씨가 이 산소통을 켜고 마이크를 켜게 되어 있어. 그럼 아저씨가 하는 말이 밖으로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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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통과 마이크를 켜고) "자, 어때? 아저씨 말소리가 좀 이상하게 들리지? 꼭 다스베이더 같기도 하고, 그치? 이렇게 아저씨가 다가가면서 "소방서에서 왔어요!"하고 말할거야. 그럼 아저씨 앞으로 이렇게 나오면 돼."


"무섭다고 침대 밑이나 옷장 안에 들어가 있는 친구들이 있는데, 혼자 있을 땐 그렇게 했더라도 이 소방관 아저씨가 오면 얼른 거기서 나와서 아저씨를 크게 불러야 해. 그래야 아저씨가 안전하게 구해줄 수 있어."


이렇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좀 큰 아이들은 제법 아는 체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들도 틈틈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또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그 순간, 나는 어쩐지 좀 슬퍼졌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일어났던 씨랜드 화재 사건, 그 일로 목숨을 잃은 어린 아이들이 떠올랐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아이 엄마가 되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그 때 이후로 과연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 때도 우리는 그 일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텐데, 바로 작년에도 우리는 아이들을 또 잃었다. 어찌된 것이 좋게 매듭지어져 '좋았다', '행복했다' 하는 해보다는 잊지 않아야 할 일들이 가득한, 기억하기에 아프고 슬픈 해가 더 늘어나고만 있는 것 같다.


미국은 화재 같은 일상적인 사고는 물론이고 총기 사고와 테러로 인한 대규모 사고, 토네이도 등의 자연재해의 위험이 높아서인지 시시때때로 각종 안전교육과 대피연습을 실시하고 있다. 토네이도 철이 되면 대학 캠퍼스에서도 대피령이 내려 수업을 하다 말고 교수와 학생 모두가 지하로 내려가는 일이 생기고, 내가 참여하는 주말 모임에서도 유사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피연습을 종종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외부인의 테러에 대비해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한 곳에 조용히 모여 있는 연습을 했는데, 연습인데도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 실제처럼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면에선 갈수록 위험해지는 요즘의 세계에서 이렇게 스스로를 지키는 연습을 하는 것, 정말 필요한 것 같다. 위험을 인지하는 능력, 위급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평소에 길러두어야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를 구해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우리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 소방서에 견학 가서 옷 입고 헬멧 쓰고 사진 찍는 데서 끝날 게 아니라, 우리 집에, 우리 학교에 불이 나면 어디로 빠져 나가 어디에서 만날지를 아이와 얘기해 보아야 한다. 대피로를 영상과 그림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 대피로를 따라 걸어 보면서 서로 질문하고 답해보아야 한다. 중앙에서 가만히 있으란다고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시하는 이들에게 '왜' 그러한지 따져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와 우리를 모두 지켜낼 수 있다. 나를 구하러 올 '에요에요 붐붐!' 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길잡이, 지지대, 구조선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잔인한 이 땅, 잔인한 이 계절에 살아남은 우리 아이들은 꼭 그래야만 한다고, 내 아이의 따뜻한 온기를 품안 가득 담고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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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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