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꼬꼬(go go!)' 소리로 시작된 온 가족 강제 기상. 그 후 한 시간 내에 이미 온 집안은 난장판이 된다. 여기는 블럭이 한 무더기, 저기는 퍼즐 판과 퍼즐 조각이 한 무더기, 또 저어기 저쪽엔 장난감 자동차가 한 무더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로질러 거실 한복판에는 일명 '꼭꼭꼭' 놀이를 위한 책과 매트 징검다리가 어김없이 놓여진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내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아이는 현관 앞에 철퍼덕 앉아 양말을 신는다. '내가 그래도 커피 마실 시간 쯤은 주지!' 하는 포즈로, 그러나 재촉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저 아이는 만 28개월의 에너자이저.


아이의 채근에 결국 남편이 집을 나설 때 나 역시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나선다. 가방엔 오전 내내 아이와 나눠 마실 물 한 통과 아이가 먹을 바나나 한 개, 지갑, 기저귀, 물티슈와 수건, 그리고 휴대용 라디오가 들어 있다. 기상 상태와 아이의 흥분도(!)를 잘 살펴 천 기저귀를 채워 나갈지 종이 기저귀를 채워 나갈지 결정하는 것이 집을 나서기 전 내가 해결해야 할 큰 일이다. 집 근처에서 산책하며 놀 태세라면 천 기저귀 여분을 챙겨 나가 근처 카페 화장실 혹은 이웃에 사는 지인의 집에 잠깐씩 들르면 되지만, 버스를 타고 큰 놀이터나 도서관에라도 나갈라치면 아예 종이 기저귀를 채워 가는 편이 낫다. 보아하니 오늘은 천기저귀를 채워도 되겠다. 그래, 가자 가!


계단을 내려가면 아이가 '의자'라고 부르는 소형 유모차와 '붐붐'이라고 부르는 빨간 자동차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아이의 갈등과 선택이 시작된다. 의자를 탈 것이냐, 붐붐을 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두 이동 수단 사이를 오가며 한참 고민하던 아이는 마침내 "붐붐 타!"하고 선언하고 자동차에 올라탄다. "엄마 잡아!" 하는 신호와 함께 나는 자동차 뒤에 길게 달린 손잡이를 잡고 입으로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자동차를 밀고 나간다. 주차장을 빠져 나와 4차선 도로를 건너면 아이만의 세상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가면 놀이터가 있는 큰 주거 단지가 나오고, 직진해서 가면 개미와 꽃과 수로가 있고, 왼쪽으로 가면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돌 수 있다. 그 중에서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코스는 1번, 놀이터 행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무규칙 3종 놀이' 두 시간 반 동안 결국 이 세 코스 모두 다 가게 되리라는 걸.


아침 여덟시 반부터 놀이터에 놀러 나오는 두 살 짜리는 이 동네에 이 아이 하나 뿐이다. 그래서 마치 전세 낸 기분으로 온 놀이터를 휘젓고 다닐 수 있다. 그네랑 시소도 타고, 정글짐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놀이기구에 올라 타 어지럼증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놀이터 놀이의 백미는 놀이터 앞에 펼쳐진 넓은 주차장 활보하기! 이동수단 '붐붐'은 엄마에게 맡겨놓고, 아이는 주차장 구석구석 마치 성지 순례라도 하듯 제가 좋아하고 아끼는 장소를 하나씩 다 밟으러 다닌다. 휠체어 이용자를 위해 만들어 둔 경사로를 우두두두 뛰어내려가고,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앞에 서서 날갯짓을 하고, 물웅덩이가 잘 생기는 지점에 가 물이 있나 없나 확인도 해본다. 커다란 쓰레기통 뒤편에 누가 아직 쓸만한 물건을 버려두지는 않았는지까지 다 확인하고 밟고 만져본 후에야 다시 붐붐에 올라타고 다음 행선지로 출발한다.


아침 놀이 두 번째 코스는 일명 '자연관찰장.' 버스가 오가는 길목에 늘어선 주택가 인도에는 유독 개미가 많이 보이는데, 아이는 개미만 지나간다 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개미를 쳐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엄마 눈엔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개미들이 어찌 이 작은 아이 눈엔 그렇게나 잘 보이는지 신기할 따름. 며칠 전엔 개미 한 마리가 죽은 거미 한 마리를 물고 가느라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는 모습을 구경했는데, 그게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아이는 아예 배를 바닥에 깔고 엎드린 채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엊그제는 이 길목에서 물이 없는 작은 수로를 하나 발견했는데, 그 수로 시작 부분의 경사로가 뭐 그렇게 재미난지 거기만 갔다 하면 십 분 동안 '붐붐'을 굴려 내렸다 끌어올렸다 무한반복하며 또 신나게 논다. 그 사이사이 풀밭과 나무를 오가는 아침 새들의 종종거림을 보는 것 역시 아이에겐 큰 재미. 바람에 꽃이 흩날리면 땅에 떨어진 꽃잎을 한 움큼 집어 엄마 손에 자동차에 흩뿌리는 아이를 보는 건 나의 재미, 나의 행복이다.


하지만 세 번째 코스는 내게 재미나 행복은 커녕 피로와 짜증을 줄 뿐이다. 이 세 번째 코스는 일명 '동네 한 바퀴'인데, 이 길을 나설 때 쯤이면 나는 이미 허기지고 피곤한 상태이기 일쑤다. 그런 내게 요 두 살짜리는 '이쪽!' '저쪽!' 하고 방향을 지시하며 제 입맛대로 길을 골라 동네를 크게, 아주 크~~~게 돌기를 원한다. 그 길을 걸어서 도는 건 물론 나 혼자다. 아이는 내가 미는 '붐붐'에 탑승한 채 유유히 제 곁을 지나는 풍경을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조금 범위를 좁혀서 돌아볼까 하고 얕은 수를 쓰다가는 두 살 아들에게 된통 혼이 난다. 11시에 문을 여는 피자 가게의 'OPEN' 표시에 불이 들어왔는지를 확인하고, 여는 시간이 날마다 조금씩 다른 초콜렛 가게를 지나 은행을 지나면 기름진 냄새 마구 풍기는 햄버거 가게 앞에 다다른다. 거기서 뒤편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면 코스를 좀 단축할 수 있는데 아이는 좀처럼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제 곧 점심 시간이니 가서 밥을 해 먹어야 한다, 곧 아빠가 올거다, 등등 사실에 입각한 말에서부터 엄마 다리 아프다, 배 고프다, 등등 동정표라도 얻어보려는 말, 점심 먹고 또 나오면 돼 하는, 마음에도 없는, 그러나 결국은 지키게 되는 약속의 말 모두 쏟아내 보지만 아이는 완강하게 요구한다. 동네를 크게, 아주 크~~~~게 돌기를.


결국 아이의 바람대로 그 큰 원을 그려 우리 아파트 주차장으로 돌아오면 시간은 어느새 열한 시 반.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의 점심 메뉴는 파스타다. 십 분이면 삶을 수 있는 파스타 면에 갈아 둔 당근, 브로콜리, 양파를 다 때려 넣고 소스를 부어 뚝딱 차려낼 수 있는 간단식. 이걸 먹는 십 오분 동안만큼은 엉덩이를 붙이고 쉴 수 있다. 그러나 아이의 숟가락질이 멈추는 순간, 나의 오후 일정은 다시 시작된다. 이번엔 커피 마실 시간도 없다. 설거지도 못하고 다시 집을 나서면서, 오후엔 비가 좀 내려주었으면 하고 기도(!)한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해는 무심히 쨍쨍 햇빛을 내리꽂고 있을 뿐이다. 안 되겠다. 기도 내용을 바꿔야겠다. 햇빛의 따뜻한 기운에 아이가 유모차에서라도 잠들어 주기를, 그래서 최단거리 동네 한바퀴를 끝내고 들어와 잠든 아이를 내려놓고 단 한 시간이라도 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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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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