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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7 올레!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모슬포행 버스를 기다리며 팀 이름을 정했다. 두 엄마와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네 아이가 2011년 가을 제주여행을 떠났다. 같은 조산원에서 아이들을 낳고 블로그 친구로 지내던 두 여자는 마음이 맞아 아이들과 함께 8박9일의 여행 가방을 꾸렸다. 

모험심이 발동하여 자가용 없이 버스를 타보자고 했다. 소문난 관광지를 도는 대신 아이들에게 제주의 하늘과 바다를 선물하겠노라 큰소리를 쳤지만, 숙소 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떠나려니 막연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제주에 가니 하루하루 무엇을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바닷가와 들판에 풀어놓으면 아이들은 알아서 놀았다. 조개껍데기와 돌을 주워다 ‘전시회’를 열고 풀밭이 나타나면 ‘약초 놀이’를 했다. 잎이 두껍고 즙이 많은 남도의 풀들은 ‘약초 연구소’에서 자르고 비비고 돌로 찧어 여러 가지 신비로운 약으로 만들어졌다. 이름 모를 넓적한 이파리는 커다란 부채가 되고, 날개가 되었다가 가면이 되었고 키 크고 무성한 억새밭은 아이들에게 숨기 좋은 ‘아지트’를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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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놀이가 절정에 이른 것은 아빠들이 내려온 주말. 우리도 이제는 폼나게 관광을 하자고 자동차를 빌려 녹차 박물관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 차밭이나 박물관에 시큰둥하던 아이들이 조그만 잔디 언덕으로 내달렸다. 네 명의 아이가 누워서 데굴데굴 신 나게 굴러 내려왔다. 구르면서 재미난 표정과 자세까지 선보이며 얼마나 진지하게 몰입하는지 마치 체조 경기를 보는 것 같았다. 둘이서 짝을 지어 손을 잡고 구르는 ‘환상의 복식’ 연기는 압권이었다. 흥에 겨워 신들린 듯 구르고 또 구르는 아이들이나 구경하며 관전평을 늘어놓는 어른들 모두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크게, 오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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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찾아간 화순의 금모래 해수욕장. 11월의 바닷가는 찬바람이 쌩쌩 불어 몹시 추웠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모래밭을 아이들이 접수했다. 말릴 겨를도 없이 신발 벗어 던지고 바지를 걷어 올려 바다로 뛰어들었다. 해질 무렵 붉게 물드는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파도와 술래잡기하는 모습이 한 권의 그림책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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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언덕에서 멋지게 잘 내려오는 비결이 뭔지 알아? 힘을 빼야 돼, 힘을!” 처음에는 자세가 어정쩡하던 아이가 노하우를 터득했다며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긴장을 풀고 온몸으로 노는 맛을 알아버린 아이처럼 우리도 그랬다. 놀잇감이나 놀거리를 정해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놀 줄 안다는 것, 놀이는 배워서 익히는 게 아니라 타고난 ‘본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울긋불긋 단풍이 깊어지는 가을, 선선한 바람 타고 어딘가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바쁜 일상에서 짬을 내려니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겠지만, 숙제하듯 빡빡한 일정을 담으려 하지 말고 조금 느슨하게 떠나보면 어떨까? 어른들의 욕심 내려놓은 그 빈자리를 아이들이 멋지게 채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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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3년 10월 8일자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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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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