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60634_P_0copy.jpg » 한겨레 자료 사진

드디어 때가 오는 모양이다. 모임에 데리고 나가도 그저 혼자, 혹은 엄마 아빠를 붙들고 장난감 자동차며 부엌놀이를 하며 놀던 아이가 조금씩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놀이터에 제 또래 아이나 형, 누나들이 오면 다가가 인사도 하고 뭔가 통하는 게 생기면 친구를 따라 깔깔 웃고 그 친구와 함께 뭔가를 하고 싶어한다. 공원 한 켠에 아이들이 탈 수 있게 만들어 둔 자동차 모형에 올라타 신나게 놀다가도 여기 이 친구도 타고 싶대하고 일러주면 순순히 내려와 양보도 할 줄 안다. 차례도 기다릴 줄 알고, 아끼는 장난감을 동생에게 나눠 줄 줄도 안다. 친구의 이름을 부를 줄도 알고, 친구가 어디 있는지 왜 오늘은 그 친구가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해할 줄도 안다. , 드디어 오는구나. 세상엔 엄마 아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깨치는 그 날이!  

 

3, 3년 그렇게 말이 많더니 이제 알겠다. 아이에게, 부모에게 첫 3년은 정말 중요하다. 흔히 말하는 생후 3년 동안의 애착과 추후 정서/지능발달의 관계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생후 3년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와 관련이 있다. 자라는 아이에겐 라는 게 있다. 젖병으로 먹다 그걸 떼고 컵에 우유를 따라 마시게 되는 것도, 무릎으로 기다가 두 발 딛고 일어서 걷는 것도, 기저귀를 벗어 던지고 팬티를 입는 것도, 다 아이 스스로 준비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다. 아이가 눈부시게 성장하는 첫 3, 양육자가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하고도 공이 많이 드는 일은 아이에게 그 가 언제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천천히 알아가는 일이다.  오로지 자기가 우주의 중심인 듯 살던 아이가 불현듯 타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는 때,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으로 서는 때 역시 자연스러운 변화 끝에 도래하게 되고, 그 때가 바로 만 세 살 무렵인 것이다

 

이때가 오면 비로소 아이는 처음으로 주양육자의 품을 떠나 좀 더 다양한 세계,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는 아이가 만 세 살이 넘으면 프리스쿨(preschool)’이라 불리는 보육기관에 많이들 보낸다에너자이저 아들과 온종일 노느라 지치고 이래저래 우울한 날이 찾아올 때마다 올해 12, 만 세 살 생일을 지내고 아이를 기관에 보낼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사립 기관에 보내기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정부 보조 무상 프로그램에 등록을 하고 기다렸다. 과연 그 날이 오긴 하는 걸까, 그 날이 오기 전에 아이가 기저귀를 떼고 친구를 좋아하게 될까 궁금했는데 우리에게도 정말로 그런 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영/유아가 보육기관에 너무 일찍부터 장시간, 전적으로 맡겨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내가 근 3년 전업육아를 하고 보니 그 생각이 더더욱 강하게 든다. 적어도 첫 3년의 중요한 성장과정을 거쳐 사회적 동물로 넘어가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아이들이 자기만의 속도로 자랄 수 있도록 좀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런 기다림, 개인의 각기 다른 속도나 방향을 허용하지 않는다. 빠른 성장과 이윤 추구, 비교 우위와 경쟁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서 '기다림'은 낭비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육아휴직을 쓰고자 하는 엄마 아빠를 기다려주지 않고, 그걸 아는 엄마 아빠는 아이를 기다려줄 수 없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일찍부터 보육기관이라는 사회에 들어가게 되면 아이는 아무래도 자신의 때와 능력을 믿고 천천히 나아가기보다는 다른 아이들과 보조를 맞춰 자신을 조정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익숙해지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찍부터 사회에 떠밀려들어가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부터 든다.  


특히 미국에서 데이케어(day care)’ 혹은 차일드 케어(child care)’라고 불리는 종일 보육시설은 생후 6주 아기들부터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어린 아이를 맡길수록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이런 시설에 6주 된 아기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란 하나뿐이다. 부모가 최소한의 육아휴직 조차도 쓸 수 없는, 그랬다가는 당장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기다림 따위 베풀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출산 6주만에 일을 나가야만 하고, 그래서 아이를 맡겨야만 하는데 보육 비용이 많이 드니 그렇게 벌어도 남는 게 없는, 일해도 일해도 오히려 모자라기만 하는 처지에 있는 부모들이 많다. 경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유심히 관찰하며 기다려주고 변화를 알아봐주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한꺼번에 많은 수의월령도 다양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보육기관 교사 역시 아이들을 일일이 기다려 줄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영아기 아이를 무조건 집에서 주양육자가 돌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웃도, 가족도 공동체성을 상실한 지 오래인 세계에서 부모 중 한 사람이 되었든 할머니가 되었든 어느 한 사람이 전적으로 영아를 돌보게 하는 것은 차라리 착취에 가깝다. 영아의 기관보육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이유는, 그것이 보육교사, 즉 다른 여성에 대한 또다른 착취로 보이기 때문이다. 부모여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 아기 돌보는 일이다. 하물며 남의 아이를 돌보는 보육교사들은 오죽할까. 아이가 아무리 예쁘고 사랑스러워도, 아무리 적성에 맞아도, 아무리 돈을 받고 하는 이어도, 아무리 책임감과 보람을 갖고 일해도, 힘든 건 힘든 거다. 마찬가지로 영아기 아이를 어느 한 사람이 혼자 집에서 돌보는 일 역시 어렵고 힘든 일이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는 제 새끼여도 365일 아이만 바라보고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면서 살 수만은 없다. 결국 아이를 키우는 일은 아이를 둘러싼 모든 세계---부모, 가족, 이웃, 보육기관 등--가 모두 힘을 모아 해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좀 기다려주면 안 될까? 기다림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몫이랄까, 희생이랄까 하는 것들을 엄마와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웃, 보육기관과 놀이시설, 직장과 국가가 서로 나누고 함께 짊어져주면 안 될까? 국가가 좋은 노동환경을 보장해주고, 직장이 엄마 아빠의 100% 유급 육아휴직을 보장해주며, 엄마 아빠가 주 양육자가 되고 때때로 전문보육기관과 연륜 있는 양육 보조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의 첫걸음을 조금은 여유롭게 지켜봐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모든 아이들이 처음 몇 년 동안 부모와 사회로부터 전적으로 지지 받고 사랑 받으며 자연스러운 자기 내면의 흐름을 따라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의 시간이 어른의 시간에, 사회의 흐름에 맞춰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국가와 직장, 사회와 부모 모두가 아이 편에 서서 아이들의 때를 기다려주어야 한다. 아이의 때를 기다리며 아이 편에 선다는 건, 결국 속도 경쟁과 자본의 편이 아니라 시간의 편, 사람의 편에 서는 것과 같다. 국가와 직장이 일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고, 부모와 보육교사가 서로의 편에 설 때, 그래서 그 모든 이 아이에게 가서 설 때, 우리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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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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