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50291_P_0.JPG » 일러스트 김영훈. 한겨레신문 자료.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늘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는 시가 있다.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라는 제목의 시다


사랑 같은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아이였던 그 때, 왜 그 시가 유독 내 마음을 울렸던 걸까. 열 너댓살 무렵이면 그 시에 흐르는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애틋함 같은 정서쯤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인 데다 그것이 힘겨웠던 우리 가족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갑작스런 변화로 도시에서 시골로 떠밀리듯 이주해야 했던, 몸과 마음 곳곳에 피로를 짊어지고 살았던 그 때, 나의 부모는 새파란 달빛 아래 시골길을 저벅저벅 걸어 들어와 새벽이면 천장에서 투둑, 떨어지는 발 많은 벌레에게 다리를 내어주며 잠을 청해야 했다. 돌아갈 곳도 반가이 만날 벗도 없이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움을 안고서도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하루하루 살아내야 했을 엄마 아빠였다. 이 시의 주인공처럼, 남들은 알지 못하는 서글픔을 안고서 말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던 때나 결혼해 독립한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변변치 않은 살림을 살고 있다. 세 식구가 한달 150만원으로 월세 내고 식비 대며 살려니 늘 남는 것 없이 똑 떨어지거나 조금씩 모자라는 형편이지만, 가난한 시골집에서 자란 남편 역시 소비를 최소화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우리는 지금 이 정도로도 그럭저럭 살 만하다. 물론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입을 만큼 넉넉하진 못하니 늘 고심해야 하고 늘 한 가지쯤은 버려야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여유 있는 집에서 유학 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때로는 외롭기도, 때로는 두렵기도 하다. 아마 그래서인가 보다. 이 시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

 

특히 버스를 타고 다니며 만나는 쓸쓸한 거리 풍경, 가난한 이들의 일상, 그리고 그 마음들은 이 시를 더 자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사는 곳은 큰 대학 캠퍼스가 자리잡은 동네이지만, 여기서 시내버스를 타고 20분만 나가보면 풍경이 확연히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캠퍼스 근처에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백인 학생과 아시아인 유학생들이지만, 시내에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개 흑인, 라틴계 이주민, 노약자, 장애인이다. 버스 환승센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 눈에 봐도 남루한 차림을 하고 있고, 버스 노선이 지나가는 좁은 골목 골목엔 허름하고 쓸쓸한 집과 점포들이 늘어서 있다. 특히 내가 아침마다 아이를 데리고 타는 버스는 장애 학생 직업 교육장, 노숙인 지원 센터, 가정폭력 지원센터 같은 지역 내 여러 기관을 거쳐가게 되어 있어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이 특히 많이 이용한다

 

그러다보니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어쩐지 서글퍼지는 날도 여럿 있다. 버스가 30분에 한 대씩밖에 다니지 않는데다 시간을 잘 맞춰 운행되는 게 아니어서 1, 2분 차이로 환승 버스를 놓치면 어쩔 수 없이 30분을 길에서 허비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또 차로 가면 15분 남짓 걸릴 거리를 버스로 가면 꼬박 1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렇게 버스를 놓친 사람들끼리, 혹은 같은 버스에 오른 사람들끼리 멍하니 거리를 내다보며 시간을 견뎌내는 일은 때때로 고통스럽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단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분명 시간일텐데, 이 곳에서 가난한 이들은 시간마저도 제대로 지켜낼 수 없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돈 대신 시간을 갖다 바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비용이 많이 드는 자가용 대신 버스를 저렴하게 이용하는 대가로 시간을 통째로 바쳐야 하고, 정부 보조 보험에 등록하고 그 혜택을 받기 위해 30, 1시간씩 전화로 대기해야 하고, 구호품을 받기 위해 1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등의 일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 중에서도 내가 마주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시간을 쪼개어 나누어야 하는 걸 볼 때다. 갓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버스에 탄 흑인 여성과 전동 휠체어를 타고 버스에 오른 노인이 구호 물품을 가득 담은 커다란 봉지를 안고 타는 라틴계 노인을 위해 서로 자리를 조정해 길을 터 준다. 승객이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출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규정 탓에 버스 기사는 이 세 사람 모두가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그 버스에 있던 승객 모두가 다음 환승 버스를 놓치게 된다. 원망과 서글픔이 뒤섞인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나대로 아이를 껴안고 피로와 서글픔, 분노 사이를 오간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측은해하거나 비난하기는 쉽지만, 그들의 삶에도 일상이 있다는 것,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고 권리가 있다는 걸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두려움을, 그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 가난하다고 해서 할 일이 없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닌데, 세상은 가난한 이들에겐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무례하게 군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에겐 감정도 시간도 사치라는 듯이.

 

며칠 전 버스에서 우리 앞자리에 앉았던 한 흑인 여성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쓰는 걸 보았다. 그는 아이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최근 알았다고 했다.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가며 그는 우리 애가 나처럼 누구에게도 존중 받지 못하고 자라고 있는 게, 너무 미안하고 화가 나.” 라고 썼다. 사람은 누구나 있는 그대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고 말은 쉽게 하지만, 우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평가하고 폄하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아이들 세계에도 쉽게 전염된다. 뭘 몰라서, 무지해서, 게을러서, 심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버려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가난을 이유로 무언가를 버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나는 그런 세상을 만나고 싶다. 가난해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 나는 그런 세상에 우리 아이를 내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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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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