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요즘 나는 매일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간다. 내가 수업을 듣는 사이, 아이는 같은 층에 마련된 보육 시설에 들어가 시간을 보낸다. 육아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얼른 오기를 바랐던 만큼,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된 학교 생활이 즐겁다. 비록 아침 9시에 집을 나서 오후 5시에 돌아오는 바쁜 생활 탓에 몸이 좀 힘들긴 하지만 집에서 전적으로 아이의 노예로 살던 때에 비하면 훨씬 살 만하다. 매일 아침 손수 도시락을 준비해주는 남편 덕에 집 밥 도시락을 싸 다니게 되면서 점심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도, 7일 풀타임 육아노동에서 주 3(학교를 가지 않는 금토일) 노동으로 줄어든 것도 우리에겐 획기적인 변화다. 물론 학교를 다니면서 힘든 점도 있다. 차로 가면 집에서 15분 남짓 걸릴 거리를 버스로 가면 가는 길 30, 오는 길 1시간이 걸리는데, 돈 없고 차는 없어도 시간만큼은 지키고 싶은 나로서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길바닥에 버려야 하는 게 너무나 아깝다.

 

05003225_P_0.JPG » 버스. 한겨레 자료 사진.


그래도 아이와 매일 버스를 타고 오가는 이 시간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건, 어쩌면 첫사랑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 일곱, 열 여덟 살, 돈은 없고 할 공부는 많은데 무려 연애를 시작한 두 아이에게 버스는 제법 괜찮은 데이트 장소였다. 그는 이 버스 데이트를 종점 여행이라고 불렀다. 시내 끝에서 다른 끝까지 갈 수 있는 버스를 하나 잡아 타고 어떤 날은 맨 뒷자리에 앉아, 어떤 날은 그 앞 어딘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꼭 종점까지 갈 필요도, 그럴 시간도 없었지만 그래도 버스를 탄 이상 이름은 꼭 종점 여행이어야 했다. 언덕진 길을 올라 달리는 버스에서 늦은 저녁의 바닷가 풍경을 멀리 내다보는 것도, 한낮에 버스 안에서 이어폰 하나씩 나눠 끼고 같은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다. 처음 같이 버스를 탔던 날 멀찍이 떨어져 앉은 내게 이어폰을 쓰려면 가까이 오는 게 좋을걸?” 하고 말하던 그에 대한 기억이 많이 사라진 지금, 내 옆에는 개구지고 얄미운 만 세 살 꼬마가 앉아 있다.

 

엄마가 저 모르게 첫사랑과의 종점 여행 추억에 빠져드는 꼴 따위는 봐줄 수 없다는 듯, 이 세 살 꼬꼬마는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를 보자마자 나를 채근한다. “엄마, 버스 티켓! 버스 티켓!” 버스 티켓을 아이 손에 쥐어주고 아이를 들쳐 안아 버스에 오르면 아이는 목청껏 버스 기사에게 굿모닝!”을 외치며 능숙한 솜씨로 티켓을 버스 티켓 단말기에 넣었다가 뺀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그 때부터 아이는 이것저것 제가 원하는 아이템을 주문하기 시작한다. 간식을 달라, 물을 달라, 심심하니 그림 그리는 판을 내놓아라, 버스가 흔들려 그림이 잘 안 그려지니 같이 그려달라 등등, 요구사항이 끝도 없다. 이것저것 다 해봐도 심심해지면 창 밖에 보이는 자동차와 공사현장 등등을 보며 아는 척 하기 놀이를 시작한다. 그러다 드디어 강을 건너고 환승센터가 가까워져 오면 소리가 나는 줄(미국 버스의 하차벨은 한국처럼 버튼식이 아니라 줄을 당겨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을 당겨 내릴 준비를 한다. 내릴 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땡큐, 도 아니고 따꾸!!!” 하고 크게 외치면서

 

두 달 넘게 월화수목, 매일같이 버스를 타고 다녔더니 아이는 이제 웬만한 버스 노선을 다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찌나 시시콜콜 잔소리가 많은지, 옆에 웬 수다쟁이 아줌마가 동행하는 기분이다. 7번 버스는 병원에 가는 버스네, 1A 버스는 쇼핑을 가는 버스네, 하면서 온 버스 노선을 다 읊고, 7번 버스와 우리가 탄 2B 버스가 갈라지는 지점에 도착하면 크게 손짓을 해 가며 우리는 여기서 가는 데가 달라지니 빠빠이를 해야 한다며 아는 척을 해댄다. 놀이터가 나오면 내렸다 가자고 칭얼대고, 왜 우리가 먼저 안 가고 7번 버스가 먼저 가냐고 따지고, 사람이 많이 타면 많이 탄다고, 안 타면 안 탄다고 뭐라 뭐라 말이 많다. 끝없이 반복되는 아이 말에 이래저래 대꾸하고 심심해! 지금 내려!”하고 징징대는 아이를 달래가며 버스에 앉아 있자면 몇 시간째 귀경버스 타고 있는 것 마냥 멀미가 난다. 이런 지경이니 첫사랑과의 종점 여행 따위는 더 곱씹어 볼 여유도 기운도 없을 수밖에!

 

그래도, 그래도 역시 종점 여행의 기본은 사랑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얄밉도록 귀찮게 굴고 수다스럽다가도, 아이가 노래를 불러달라 청했을 때 아이 귀에 입을 대고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주고 있노라면 이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존재가 참으로 귀엽고 고맙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아이는 가끔 내게 안겨 시키지도 않은 뽀뽀를 마구 퍼붓기도 하고 내게 손가락 하트를 뿅뿅 날리며 사랑한다 말한다. 가끔 하교길에 남편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셋이 함께 마지막 환승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날이면 이 두 남자를 나란히 앉혀 놓고 바라보며 상념에 빠진다. 이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와 평생 여행을 할 사람들이구나. 첫사랑과의 종점 여행,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행. 그걸 나와 같이 할 사람이 둘이나 있구나. 그것도 웃는 모습이 똑 닮은 남자 둘이. 과연 열 일곱 그 때의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물으면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쉽지 않지만, 지금 이 세 살 꼬마와 매일 떠나는 종점 여행은 분명 사랑 그 자체다. 버스에 사랑을 싣고, 우리는 내일 또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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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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