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이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구나… 
아비규환의 분만 현장, 백지처럼 깨끗한 숙명이 눈앞에 나타났다

진짜 몰랐다. 내 남편이 그럴 줄은. 72시간의 진통을 견디는 아내 옆을 꼬박 지키면서 밥도 잠도 포기했다던 송아무개 선배의 경험담을 미리 들은 터였다. 내 남편도 당연히 출산의 고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휴대폰 충전기를 놓고 와서 집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간 김에 밥도 좀 먹고….” 헐. 이것이 분만 대기실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던진 남편의 말이라니. 순간 느낌이 빡 왔다. 아, 평생을 두고두고 원망의 순간마다 우려먹을 수 있는 말을 그가 내뱉고 있구나. 아직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곧 휘몰아닥칠 폭풍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밥을 먹고 오겠다고? 나는 입을 앙다문 채 대답했다. “한 끼 굶는다고 안 죽어.”

이글거리는 분노의 기운을 감지한 남편은 재빨리 포기하고 곁을 지켰다. 그는 나중에 “출산의 과정이 워낙 길고 힘들기 때문에 아내도 남편도 처음에 밥을 든든히 먹어둬야 견딜 수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고 해명했다. 그래, 매뉴얼에 지나치게 충실했던 것으로 해두자.

남편의 예상을 깨고 진행은 훨씬 빨리 이뤄졌다. 생리통과 비슷한 수준의 진통을 1시간쯤 겪자 그 강도가 점점 세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은 진통이 왔을 때 그동안 열심히 연습해온 복식호흡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됐다. 진통이 내리꽂히는 그 몇십 초의 시간 동안엔 온몸을 뒤틀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한 손은 남편의 손을 부서져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침대 가죽을 쥐어뜯었다. 이 고통을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이나 반복해야 하는 걸까. 고통 자체보다는 이 고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나를 더 괴롭혔다.

진통의 강도가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할 무렵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이 뭔가를 밀어내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아, 이거 예사롭지 않다. 호출된 간호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내진을 해보더니 깜짝 놀랐다. “당장 분만실로 갑시다.”

분만실에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난다. 죽지 않기 위해 악을 쓰며 버텼다. 그러기를 30분. 아기 머리가 나왔다는 소리가 들렸고 왈칵하는 느낌과 함께 아기의 몸이 빠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아, 드디어 끝났구나. 그 순간만큼은 ‘태어남’에 대한 설렘보다는 ‘끝남’에 대한 안도감이 더 컸다.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 내가 온전히 나 혼자로 존재하던 35년의 시간은 여기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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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낳았다. 봐도 봐도 신기하기만 한 아이. 송채경화 기자

몸에서 빠져나온 아기가 배 위에 올려졌을 때, 어이쿠 얘 좀 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한 인간이 이렇게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막 태어나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더 이상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사무쳤다. ‘나’는 사라지고 대신 거기엔 ‘엄마’가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기쁨도 슬픔도 감격도 아니었다.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모든 감정이 백지처럼 깨끗해졌다. 내 피와 살로 만들어진 아이, 내가 만들어낸 존재가 여기에 있다. 그의 생명이, 삶의 방향이 이제 내 손에 달렸다. 묵직한 책임감이 그 백지에 가장 먼저 스며들었다. 드디어 나는 엄마가 되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이 글은 한겨레21 제1084호(2015.10.30)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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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채경화
결혼 안 한다고 큰 소리치다가 서른넷에 결혼했다. 아이를 안 낳겠다고 떠들다가 결혼한지 1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 ‘평생 자유롭게 살겠다’던 20대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 하루하루 모성애를 탐구하며 보내는 서른 여섯 초보 엄마. 2008년 <한겨레>에 입사해 사회부, 정치부를 거쳐 <한겨레21> 정치팀에서 일하다 현재 육아휴직중이다.
이메일 :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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