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본 -버니와 고양이.jpg » 앙큼이가 미술시간에 선생님과 같이 만든 토끼인형 버니와 석고 고양이. 버니를 아끼는 모그처럼 앙큼이도 토끼인형을 버니라 이름 짓고 잠친구 삼아 데리고 다닌다.

 

“엄마, 난 왜 혼낼 수 없어?”
아침 ‘유치원 등원전쟁’을 벌이고 현관문을 열고 나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던 내 뒤통수가 갑자기 저릿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다시 질문 의도를 파악하려
“너도 누구를 혼내고 싶어?” 다시 물었다.
“아니. 맨날 나만 혼나잖아. 아빠도 혼내고 엄마도 혼내고 선생님도 혼내고….”
자기는 왜 혼나기만 하는지, 듣고보니 존재론적 물음이었다.
 
아침잠 깨우기까지는 분위기가 좋다.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 일어나세요 쪼옥!” 안 되면 막춤을 동원하는 엄마의 갖은 재롱(?)에 마지못해 일어나준다.
그 다음 밥 먹이기, 이 닦이기, 옷 입히기…. 잠이 덜 깬 앙큼이는 수동적인 태엽 인형이 된다. 조이다 조이다 긴장감은 높아지고 태엽이 잘 안돌아가는 순간, 내 머리 꼭대기에선 화산이 마구 뿜어져 나온다.
“네가 좀 알아서 하란 말이야!”
분출된 뜨거운 용암은 아이의 마음에 화상을 입히고 만다.
병설 유치원을 다니는 1년 동안 앙큼이는 스스로 하기 교육을 열심히 배웠다.
그럼에도 집에선 그게 잘 안 된다. 엄마 성격이 급해서 기다려주질 못한 탓이다.
직장맘이 그렇듯 아침 9시까지 데려다주고 출근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에 꾸물거리며 옆으로 새는 아이를 기다려주기가 쉽잖다.
 
IMG_9793.JPG » 출산휴가 뒤 아기를 기다리며 바느질해 만든 수면인형 '랑이'. 원래 호랑이라고 만들었으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앙큼이는 자연스레 '양이'로 바꿔불렀다. 엄마의 정성을 아는 듯 아직까지 애용하는 인형이다.

 

 ‘난 왜 혼낼 수 없어?’는 마음 속 내상이 응축된 말이었다.
혼낼 권한은 없이 혼나기만 하는 무기력한 작은 존재. 아이심리 전문가 서천석 선생님은 아이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불안이라고 했다. 작고 힘없고 두려움 가득한 존재. 엄마나 아빠는 양육자라는 이름으로 수시로 빨간 괴물과 초록 괴물로 변신해 윽박지르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앙큼이가 좋아하는 모그도 툭하면 데비 아빠와 엄마한테 혼난다.
앙큼이는 아마도 모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모그가 부러 아빠 소파에 오줌쌌냔 말이다. 그냥 까만 밤중에 본 하얀 천막괴물이 무서워 자기도 모르게 나온걸. 아빠가 딱 잘라 “성가신 고양이 녀석”이라고 타박을 할 건 뭐냐고~.
또 모그가 아끼는 토끼인형 버니를 식탁 위 과일쟁반에 올려놓았기로서니,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건 뭐람? 모그의 가장 소중한 토끼 버니도 맛있는 과일이 먹고 싶지 않겠냐고요, 엄마? 앙큼이는 속상해 죽겠다는 듯 “모그가 불쌍해” 한다. 모그의 행동은 다 이유가 있는데, 어른들은 그것도 모르고 말썽만 피우고 지저분하다고 혼쭐낸다.  
   
주디스 커의 <고양이 모그> 시리즈 중 앙큼군의 애장본은 <모그하고 버니하고>와 <모그와 고양이 대회>다. 앙큼이가 기분이 울적할 때면 수시로 꺼내본다. 백설공주를 패러디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7D>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에 빗대면 앙큼군의 감정상태는 대개 ‘기쁨이’지만 밥상머리에서 혼날 때나 떼부려 혼날 때는 가끔 ‘슬픔이’가 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모그가 앙큼이 기분을 달래준다. ‘앙큼아 기분 안좋으냐옹? 네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알아. 어른들은 다 제멋대로야옹.’ 모그가 이렇게 말이라고 거는 듯하다.
  
<모그하고 버니하고>는 아이의 애착 물건에 관한 은유다.

 모그하고 버니하고.jpg  
  
어느날 모그는 데비와 니키한테 작은 토끼인형 버니를 선물로 받았다. 버니가 마음에 쏙 든 모그는 어디든 데리고 다닌다. 발로 장난치며 요렇게도 저렇게도 놀았다. 모그가 하도 아끼는 바람에 버니는 귀 한쪽, 두 쪽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꼬질꼬질한 낡은 인형이 된다. 저녁을 먹을 때도 같이, 잘 때도 모그 바구니에서 함께 자는 잠친구가 됐다. 물 먹으라고 물그릇에도 빠뜨려 놓는다. 모그는 버니를 아빠 신발 속이나 옷장 속에 데려다 놓기도 한다. 그곳은 모그에게 아주 특별한 공간이니까. 엄마가 간식거리를 나르는 방문 앞이나 책을 읽어주려는 아빠 의자 위에 갖다놓거나 식탁 위 과일 쟁반에 올려놔 어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럴 때마다 모그는 혼이 나고 버니는 쓰레기통에 버려질 위기에 처한다. 어른들은 모그 마음을 참 모른다.   
마당에서 바비큐 저녁을 즐기던 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집으로 뛰어들어갔는데 모그가 보이지 않았다. 비는 쏟아지는데, 모그 바구니침대엔 모그도 버니도 없다. 데비와 니키는 걱정이 돼 잠을 잘 수 없다. 우산을 쓰고 나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모그를 부르니 어디선가 “야옹” 소리가 났다. 모그는 비를 줄줄 맞으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버니는 바비큐 불쏘시개 꼬챙이 아래에 깔려 있었다. 모그는 버니를 꺼내지 못해 비를 줄줄 맞으며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은 언제봐도 뭉클하다. 버니를 구해주자 모그는 바구니에서 꿀잠을 잔다. 아이들도 각자의 잠친구를 데리고 단잠에 빠져든다. 난방기 위에 말렸던 젖은 버니는? 어느새 모그랑 같이 놀고 있다. 엄마 아빠도 밤에 있었던 모그 이야기를 듣고, 버니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모그와 고양이대회>는 데비네 집 정원에서 열리는 고양이대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유쾌한 사건을 그렸다.
모그와 고양이대회.jpg  
데비는 모그가 분명 고양이대회에 1등할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막상 고양이대회가 열리는 날 모그가 보이지 않는다. 한밤중에 쥐사냥을 나가려던 모그는 고양이대회를 위한 천막을 보고 펄럭이 괴물이 덤비는 줄 알고 이 방으로 저 방으로 쫓겨 달아나다가 그만 데비 아빠의 의자에 오줌을 누고 만다. 다음날 아빠는 “그 못된 고양이, 어디 잡히기만 해 봐라!”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모그는 아빠가 무서워서 다락방으로 도망가서 영원히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엄마아빠한테 혼나면 자기만의 공간으로 숨는 아이와 같이, 모그는 혼자만의 방에서 너무너무 슬프게 밤을 보냈다.   
한편 마당에선 고양이대회 준비가 한창이다. 샴 고양이, 까망이, 진저, 토미, 플러피, 동네 고양이들이 몰려왔다. 가장 특이한 고양이가 누굴까 애완동물 가게 번스 아저씨가 점수를 매기는데, 갑자기 비보다 더 큰 것이 천장을 뚫고 들어왔다. 모그는 밤에 본 펄럭이 괴물이 더이상 무섭지 않자, 다락방에서 천을 두르고 뛰어내린 것이다. 모그가 1등을 차지한 건 당연지사. “서커스 고양이처럼 하늘을 날았으니까요. 모그는 곡예사입니다.” 모그 귀를 물어뜯은 플러피네 빼고는 다들 1등을 축하해줬다. 모그는 말랑말랑한 고무쥐 놀잇감을 상품으로 받았고, 엄마아빠도 상장을 받아 온 모그가 자랑스럽다.
  
생각보다 슬픈 일이 많은 유년기. 사고뭉치 모그가 빚어내는 엉뚱발랄한 감동 반전이 슬픔을 딛고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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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귀순
일찌감치 결혼했으나, 아이 없이 지낸지 13년. ‘룰루나 행성’에서 꽃을 키우며 지내던 앙큼군은 우주 폭풍을 만나 어느날 지구별로 떨어졌다. 아이가 없는 집을 둘러보다 우리집으로 왔다. 어딜 가나 엄마들한테 ‘언니’라는 호칭으로 통하는 ‘늙은 엄마’이지만, 앙큼군은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다행이야”를 달고 사는 여섯 살 소년으로 자랐다. 곰팅맘은 현재 한겨레 편집 기자이며, 책과 지성 섹션에 어린이청소년 책을 소개하는 기사도 쓰고 있다.
이메일 : gskw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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