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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심란해지는
집안의 공간들이 있다.

책, 교과서, 학용품, 학교 준비물, 아이 옷에 장난감까지..
바로 아이들 방이다.
언뜻 보면 물건이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 듯,
그런대로 정리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엄마는 잘 안다.

저 속에 불필요한 물건과 아이의 연령에 맞지않은 물건들이
얼마나 수북하게 쌓여있는지.
내 물건이면 버릴 것 버리고 남길 건 남기고 할텐데
아이들과 연관된 물건은 이상하게도 참 정리하기가 어렵다.

우리 아이 손때가 묻은 건데..
싶은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가 입던 옷들도 이미 작아져 다시 입을 일이 없다는 걸 알지만
과감하게 버리거나 남을 주거나 하는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 권 한 권, 가격이 정확히 적혀있는 책은 또 어떤가.
저게 다 돈 주고 산 건데.. 하는 생각이 앞서기도 하고
또 언젠가 한번은 더 보지 않을까..싶어 책은 늘 그 자리다.

생각만 해도 가끔 몸서리가 쳐지는 장난감..
하나하나 꺼내 볼 때마다 저거 사달라 울고불고
매장 바닥을 눈물바다로 만들던 아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 한바탕 난리법썩을 피우고 사준 장난감이건만
몇 번 안 놀고 그대로 방치된 모습(속마음으론'꼴'이라 쓰고 있다)
을 보노라면,
'내 이걸 그냥.. 학교갔다 오기만 해봐!'
씩씩거리며 분노의 걸레질을 한다.

유치원, 학교에서 가져온 아이들의 그림이나
크기부터 부담스러운 만들기 작품, 몇 년이나 지난 교과서도
분류도 되지 않은 채 대충대충 어딘가에 박혀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도대체 그 '언젠가'는 언제 온단 말인가!

이제 곧 첫째인 딸이 중학교에 입학을 한다.
6년간의 기나긴 초등 시절을 정리하고 새 학교, 새 학기에 진학을 앞둔 요즘.
아이도 방을 한번 바꿔보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도 엄마인 나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큰 문제없어 보이는 아이 방 속속을 털어내면
얼마나 방대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올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 방 물건 다이어트.
아직도 한창 진행중이긴 하지만, 봄이 얼른 들이닥치기 전에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고 있다.
너무 많은 종이들을 분류하고 버리는 데,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린다.
'어머 이런 때도 있었네, 이게 언제적 사진이야!' 하며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이나 아이가 쓴 글, 그림들이 발견된 때면
보물을 발견한 듯 한참을 함께 들여다 보며 수다를 떨곤 한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시간도 잠시뿐,
우리는 다시 수많은 물건들 속에서 사투를 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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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겨우 침대 주변이 말끔해졌다.
"어머, 니 침대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구나."
약간 모자란 엄마처럼 나는 딸에게 이렇게 외친다.

아이의 침대는 수십개는 될듯한 크고 작은 인형들에
늘 점령당한 채 몇 년을 지내왔던 것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엄마아빠를 양보하고
동물 인형들에게 마음을 의지하며 매일밤 잠들었을
아이의 초등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찡해진다.

이젠 중학생 언니가 되니, 그런 과거(?)도 좀 정리하자.
물건 다이어트와 함께 마음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해.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이불 커버는 항상 이런 모습으로 세팅하기!
올해의 약속으로 아이와 함께 침대 사진을 찍어 두었다.
잠자는 환경이 심플하고 깔끔해야
기분좋게 아침을 맞이하는 법.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할 시기인 14살에겐
공간을 통해 기분전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다음은 아이 방의 하이라이트, 책상.
큰아이에게 처음 책상을 사 줄 때 부모들의 그 요란스러움이란!
인체공학적인 설계니 척추를 보호하는 의자가 어쩌구저쩌구
아이의 성장에 맞춰 높낮이를 6단계로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

그런데
아이 하나만 키워봐도 이런 우수한 기능의 책상과
아이의 학습능력과는 그닥.. 큰 연관이 없는 것 같다.
저학년 시절에는 그럭저럭 깔끔했던 아이의 책상은
고학년이 되면서 거의 잡동사니들의 집합소 혹은 전시장처럼
변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책상 위를 정리하기 귀찮은 아이는
학교 숙제는 방바닥에서 엎드려 하곤 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엄마의 한숨과 잔소리는 극대화된다.
내가 너 이러라고 그 비싼 돈 주고 책상 사줬냐
그렇게 정리 안 하고 그 모양이니 성적이 맨날 그렇지
니 친구 00는 너처럼 안 그런다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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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둘째 때는 결심했더랬다.
1. 꼭 '책상'이 아니라도 괜찮다.

2. 초등 입학과 동시에 사지 않아도 괜찮다.
3. 책상을 꼭 아이 방에 두지 않아도 괜찮다.
4. 책상 위에 너무 많은 물건을 두지 않는다.


이렇게, 첫째 때의 시행착오가 반영된 둘째 아이의 책상은 위의 사진같은 모습이다.

가구 매장에서 테이블만 따로 모아둔 전시장에서 10만원대로 구입한

튼튼하고 마음에 드는 색감의 원목 탁자와(의자 등의 부속품이 없는)

큰아이 때부터 써왔던 어린이용 높낮이 조절이 되는 의자가

마침 색깔도 맞아 이걸 그대로 재활용하기로 했다.


아이가 저학년 시기, 특히 초등에 갓 입학했을 때는

자기 방에서 따로 공부하기보다 거실이 더 나은 것 같아

이 책상은 지금 우리집 거실에 놓아 두었다.

전형적인 '책상'이 아니니 거실에 두어도 별로 튀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학용품이나 잡다한 물건은 작은 수납장에 넣어 탁자 밑에 보관하고

책상 위에는 교과서, 보관용 파일,

문제집 몇 권, 요즘 좋아하는 그림책 몇 권 등

꼭 필요한 것만 작은 책꽂이에 꽂아 두고 있다.


둘째가 아들이다보니, 아이 책상 위의 물건을 다이어트한 건

정말 도움되는 방법이었다.

산만한 아이일수록 아이가 쓰는 물건이나 주변 환경을 심플하게 만들어주어야

물건도 쉽게 찾고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것 같다.

아이가 지금 당장 처리해야할 일들이(숙제, 정리정돈 등)

쉽고 빨리 끝나면 짜증을 덜 내고 덜 피곤해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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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나 공부를 할 때 쓰는 도구들도
꼭 필요한 것만 심플하게 준비하며 1학년을 보냈다.
연필은 한 두 자루만 준비해 다 쓰고 나면 새 걸 꺼내 쓰는 방법으로.
연필 두 자루, 지우개, 채점을 위한 빨간 색연필, 가위 풀, 연필깍기..
저학년의 일상적인 공부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물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에서 고르고 선택하기 위한 시간을 또 써야하고
산만하고 집중력이 약한 아이들은 결정하고 판단하기가 점점 귀찮아진다.

아이에게 왜 이리 집중을 못 하니.
왜 이리 시간이 많이 걸리니.
왜 스스로 못 하니.
언제까지 도와줘야 하니..

아이가 초등 시절의 긴 시간을 지나는 내내
부모와 아이는 이런 말들로 늘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잠시, 아이의 뒤죽박죽한 책상과 방을 나와
부엌으로 가 보자.
엄마가 쓰는 부엌과 아이의 방 중 어느 곳이 더 나은지.

아이가 생활하는 방과 책상은
어쩜 우리 엄마들의 부엌과 싱크대 위와 같은지도 모른다.
매일 쓰는 곳이지만 내 뜻대로 깨끗하게 유지가 잘 되지 않는 곳.
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늘 실천이 잘 되지 않는 곳.
그래서 누군가에게 지적을 당하면 더 기분나쁘고 하기 싫어지는 공간.

왜냐하면, 아이의 방과 책상도 엄마의 부엌도
좁은 공간에 비해 많은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꼭 필요하고 다 쓰는 물건들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쓸지도 모르고 나름의 추억들이 얽혀있는 물건들이 많아
쉽게 정리정돈이 안 되는 공간이라서다.

그래서 아이의 방과 부엌은
집안 어느 곳보다 다이어트가 더 필요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새봄, 새학기가 벌써 저만치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요즘,
아이와 함께 방과 책상 위를 정리해 보는 건 어떨까.
아이가 쓰는 공간을 좀 과감할만큼 심플하게 구성해 보는 것,
아이 삶의 집중력을 높여주는 좋은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른보다 좀 다른 것은
이 환경을 아이들은 오감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보았던 어떤 집이나 공간에 대해
시각 뿐만이 아니라 냄새나 촉감, 분위기, 느낌같은 다양한 형태로
오랫동안 기억하곤 한다.
아이들에게 매일 바라보고 생활하는 환경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닐까.

아직 남은 아이의 방 정리.
아이의 물건들을 다이어트하며
엄마인 나의 마음도 리셋하는 계기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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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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