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생 때, 다른 과목은 열심히 하면 이해도 어느 정도 하면서 성적도 잘 받았던 반면 수학 과목만큼은 늘 뜻대로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특히 국어와 영어를 잘했던 나는 이 두 과목에 비해 수학 과목 성취도가 너무 낮아 과목 담당 교사들로부터 꽤나 비교를 당했다. 수학 선생님은 “왜 너는 수업 시간엔 그렇게 열심히 듣고 고개 끄덕여가며 아는 것처럼 하다가도 문제만 풀었다 하면 엉망이 되냐”며 핀잔을 주었고, 친구들은 생일 선물로 수학 문제집을 사다 주면서 영어에 비해 수학을 너무 못하는 나를 놀리곤 했다. 수능 시험을 앞둔 고 3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몇 달간 수학 과외를 받았는데, 그래도 수리 영역 수능 점수는 80점 만점에 겨우 50점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내게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될 기미가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나눗셈을 처음 배울 때였다. 구구단까지는 어찌어찌 외웠는데 그걸 나눗셈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인지, 나는 학교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나눗셈 때문에 ‘나머지 공부’라는 걸 하게 되었다. 그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는 걸 보면 그게 내겐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 이후로 내가 수학을 지레 포기하거나 기피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공부 욕심이 있고 모범생 콤플렉스가 있는 아이였던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수학을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수학은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었다. 성격상 뭔가 납득이 안 되면 절대 ‘그냥 외우기’ 따위는 하지 못하는 성미라 더더욱 힘이 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어쩌면 수에 관한 한 문제와 개념 이해력이 떨어지는 학습 장애를 겪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지금도 덧셈 뺄셈 같은 연산을 할 때 내 암산 능력을 믿지 못해 꼭 손가락으로 꼽아 검산을 하는 버릇을 갖고 있는데, 최근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수학 관련 학습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수 계산을 할 때 손가락 셈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랬던 내가 서른이 넘은 애 엄마가 되어, 그것도 다른 나라에 와서 다시 수학 수업을 듣고 있다. 학교 과정을 다 끝낸지 한참이 지난 뒤 그것도 외국어로 수학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수업을 시작하고 보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성인 대상의 ‘고등학교’라 학생들 수준이 천차만별이어서 수업 평균 수준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은 한국의 수업 과정과 비교하면 중학교 2, 3학년 수준에 불과해서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공식을 대입하기만 하면 풀 수 있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었다. 또 단원이 넘어가도 이전에 했던 내용을 계속 반복하면서 새로운 내용을 조금씩 조금씩 추가하면서 내놓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전환 없이 천천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용어를 새로 배우는 일이 남아 있긴 했지만, 문제를 푸는 데는 용어도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조금 헷갈린다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질문할 수 있었고, 교사는 내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주기도 했다.
사실 이곳의 수업 방식과 평가 방식은 학생에게 부담이 덜 가는 구조로 되어 있어 나 같은 ‘수포자’도 부담없이 수학 문제를 ‘즐길’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교실 벽면 곳곳에 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공식과 도표, 그래프 등을 써서 붙여놓아 수업 중에 수시로 기웃거리며 공식과 그래프 모양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고, 시험을 볼 때도 과정을 중요하게 여겨 학생의 문제 풀이 과정을 읽어보고 부분 점수를 후하게 주거나 추가 점수를 주는 것도 신선했다. 또 이곳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수 개념 이해도가 더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들에 대해 계산기 사용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물론 이렇게 수업 방식과 내용에 차이가 있어도 이 곳의 정규 학교 학생들 중엔 수학을 못해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적어도 한국 교육 경험자로서 체험한 바에 따르면 이 곳의 방식이 훨씬 덜 부담스럽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이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목을 수강해 40학점을 따고 수학, 영어 각 1회씩 ECA(End of Course Assessment)라는 시험을 치러 통과해야 하는데, 얼마 전 치른 수학 ECA에서 나는 이 학교 사상 최고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게다가 나는 한국식 교육의 결과로 이 곳 학생들보다 계산을 두 배 이상 ‘빨리빨리’ 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최단시간 내에 시험을 치러 최고점을 받아낸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한국에서 십대를 보낼 당시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구제불능 수포자’가 순식간에 수학 우등생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시험 통과를 알리는 축하 메시지를 열어보며 웃는 내 모습>
이 수학 수업과 시험을 계기로, 나는 지금껏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수학을 비로소 온전히 즐기게 되었다. 당장 ‘입시’라는 부담이 없는 상태인데다 나이만큼 굵어진 머리 탓에 어린 시절엔 전혀 이해할 수도 즐길 수도 없었던 수학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특히 육아에 지쳐 피곤한 날, 수학 문제를 풀며 공식과 풀이 자체에 몰두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부지런히 손을 놀려 연필로 사각사각 풀이과정을 써 내려가다 하나의 답을 탁, 하고 내놓는 순간엔 어떤 희열마저 느껴졌다. 수포자가 수학 문제를 풀면서 희열을 느끼다니, 이런 경지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언젠가 <한겨레>에서 한국의 현행 수학 교과과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를 냈을 때 한 전문가의 말이 인용된 적이 있다. 인간의 “수학적 성숙” 과정은 “다분히 생물학적”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여기에도 평균치라는 게 있긴 하겠지만, 수포자였던 나는 안다. 나처럼 ‘수학적 성숙’이 평균치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도 나이가 들어 다른 방면의 인지 능력과 경험치가 쌓이고 나면 좀 더 수월하게 수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자라 학교 과정을 밟으며 어떤 과목에서 부담을 느끼게 된다면 그 부담을 덜어낼 수 있는 방향을 함께 찾아 조금 더디더라도 스스로 기꺼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다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수준을 알고 조금씩 천천히 가면서 배우는 기쁨, 답을 깨치는 순간의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그리고 모든 과목, 모든 영역에서 다 잘 할 수 없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임을 알려주고,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을 찾아 공부도 인생도 가꿔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그게 말처럼 쉽지 않으리란 건 알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그런 경험을 해 보았으니 이전보다 더 쉽게 이런 방식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조금씩 천천히 이해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기쁨을 아는 아이로 키워내는 일. 아마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지독한 수포자였던 엄마로서 해낼 수 있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