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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째 집안 살림 다이어트를 하면서 매 순간 절감하는 건
지금 내 앞에 놓인 과제(청소, 정리, 설거지, 빨래 등등)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즐겁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인 정리가 이미 되어있는 공간을 청소하는 것,
몇 개 안되는 설거지를 해 치우는 것,
밝은 색/어두운 색으로 미리 구분된 빨래감을 세탁기에 돌리는 일처럼,

내게 주어진 집안일 과제가 단순화와 분류의 과정을 거치고 난 것일수록
힘들이지 않고 짧은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었고,
그런 심플한 과정의 반복을 통해
살림과 나에 대한 자신감을 쌓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공부와 친해지고 효율적으로 해 나가는데도
바로 이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공부 다이어트.
그래 바로 이거다.
오늘은 '공부 다이어트'로 자라고 있는
우리집 두 아이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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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큰아이가 6학년, 작은아이가 1학년이 되면서
나는 초등1학년 학부형만 두 번째 경험하고 있다.
우리 부부의 육아철학은 자연주의 육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학교 교육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현대의 학교가 가진 부정적인 면을 꼽자면 한도끝도 없겠지만
아이가 다닐 해당 학교 환경에 특별히 심각한 문제만 없다면,
학교 공부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
특히 6년간의 초등 교육은 아이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열심히 한다고 다 잘되는 게 아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수한 벽에 둘러쌓인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삶, 공부, 돈을 둘러싼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 기본과 기초가 중요하고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쌓아가는 것,
- 어렵고 귀찮은 과정을 견딜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
- 주변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자기만의 판단과 결정력

여기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를 기를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초등 교육과정이고, 아이가 이러한 힘을 기르는데는
여러 교육을 다양하게 시키는 것보다
핵심적인 요소들을 선별하고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은 최대한 배제해 주고자 노력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늘 드는 생각은

아이가 어떤 부분이든 '기본'을 제때 갖추지 못하면

다음 단계에서 쉽게 좌절하고 반복되는 실패에 자신감을 잃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초등 1학년 때 배우는 공부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국어도 수학도 개념들로 가득 찬 학년인 것 같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의 기초적인 개념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은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가 공부해야 하기 마련인데

이 과정이 힘들고 싫어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1차 수포자가 2,3학년 시기부터 나오기도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일 것이다.


그런데 공부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스스로 헤쳐가야하는 육아와 살림 앞에서

시간이 지나도 적응을 못하고 뒤죽박죽 되는대로 살았던 예전의 나는

구구단도 제대로 외우지 않은 채, 고학년 수학을 풀겠다고 덤비는 것과

뭐가 달랐을까.


삶에도 기본적인 스킬들을 먼저 몸에 익혀야

응용이 가능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나는

큰아이의 공부도 기본기를 제대로 갖추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 유아기는 놀이와 체험 중심으로

- 책은 전집이 아닌 단행본 중심으로

- 본격적인 학습의 시작은 초등 입학과 함께

- 선행보다 수업시간에 집중, 예습보다 복습 중심으로

- 어려운 문제보다 기본 개념을 확실히 할 수 있는 문제집을 이용

- 공부 시간은 짧고 굵게 저학년은 10-20분, 고학년은 30-40분을 넘지 않게

- 학습을 위한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 공부보다 책보다 실체험을 먼저


6년 동안 이것만 꾸준히 실천하면

아이의 기본적인 공부 근육은 단련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제는 우리집, 우리 아이만 두고 보면 괜찮은데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어떤가에 따라 항상 초심이 흔들리게 된다.

예상했던 대로 남들 하는 것보다 훨씬 느긋하게 천천히 가다보니,

저학년 동안은 학습적인 면에서 크게 눈에 띄는 일이 없었다.


첫아이인데 왜 욕심이 없었을까.

조바심도 나고, 이래서 다들 어릴 때부터 바짝 시키나 보다.. 싶을 때도 있었다.

아이에겐 너무 미안했지만, 부모가 아무 것도 안해도 학교 들어가자마자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과 마음 속으로 비교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아쉬운 마음을 더 크게 채워주었던 건

공부 다이어트로 얻어진 충분한 시간과 여유 속에서

지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을 맘껏 누리며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큰아이가 3,4학년 정도까지는 공부실력은 평범했지만

다른 부분의 집중도나 능력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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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그동안 미술 수업 시간에 그린 그림과 작품들이다.

잘 그리고 만든다기 보다, 집중력과 표현력, 마지막 완성하기까지의 끈기가

대단하다며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 선생님들이 놀라워 하셨다.


아이의 성적에 서서히 변화가 찾아온 건

자기만의 세계와 관심 분야가 점점 뚜렷해져 가는 고학년 이후였다.

4학년 말부터 받아오는 성적표가 부쩍 좋아지더니

그로부터 5학년 1학기, 2학기, 6학년 1학기, 2학기까지

꾸준하게 성적이 오르고 있다.

크게 힘들게 공부한 것도 아닌데, 학기마다 점점 성적이 좋아지고 있으니

아이도 얼떨떨하면서도 부쩍 자신감이 생기는 모양이다.

선생님의 칭찬과 친구들 사이의 인정은

아이의 자신감에 객관성을 더해 주었다.


특이한 건, 특정한 몇 과목이 아니라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예체능 성적이

골고루 좋다는 점이었다. 아마, 그동안 공부에 질리거나 지치지 않았던 것,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 덕에 아이의 집중력과 사고력이 방해받지 않고

자라날 수 있었던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제 곧 초등 졸업과 중등 입학을 앞두고 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스스로 공부해 보자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필요하면 학원의 도움도 받아야 하고,

고교 입시가 다가오면 그래야 할 때가 머잖아 찾아오고

초등 때처럼,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6년 동안

'비움으로써 제대로 채워지는' 공부 다이어트의 기본은

꾸준하게 지켜나가고 싶다.

그 선택권은 이제 아이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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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까지 초등 입학을 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뇌과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어 보았다.
육아와 교육을 둘러싼 뇌과학의 최신 연구 중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는데,

700만년 전부터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 인간의 출산은
네 발로 걸을 때보다 좁아진 산도를 통과하기 위해
아기의 뇌는 점점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단다.

이렇게 미숙한 뇌는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어떤 어려운 환경에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아이가 태어난 후, 10여년에 걸쳐 이유없는 울음과 짜증, 폭력성과 같은
어른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불가해한 행동을 아이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유에는
미숙한 뇌가 서서히 발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런 현상이란 것이다.

고작 열 문제도 안되는 수학 문제에
아이가 그토록 짜증을 내고 진상을 부리는 이유가,
몇 줄 안되는 문장을 읽어내는 집중력이 길러지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과 부모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사진 속의 뇌 모습처럼, 아이들의 공부는
한땀한땀 수를 놓듯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 같다.
욕심부리지 않고, 대박을 기대하지 않고,
하루하루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하나씩 해 나가다 보면 자기 나름의 공부 근육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공부를 통해 키워진 힘으로
일상 생활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분석하고 이해해서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해결해 가게 되지 않을까.
성적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공부와 삶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
수동적인 주변인이 아닌,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주체.
공부와 살림 다이어트는 결국 삶의 변두리에서 헤매던
자신을 그 중심으로 데려다 놓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공부 다이어트로 자란 큰아이에겐
지난 13년 동안 그런 연습이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봄이 오면 초등 2학년이 되는 둘째는 큰아이와는 또 다르다.
아들인데다 또래보다 더 느긋하게 자라는 아이라
작은 습관 하나 익히는데도
큰아이보다 2,3배는 힘이 든다.

그래도 불필요한 학습량을 줄이고,
기본에 충실한 심플한 공부 다이어트는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오늘 하루, 바늘 한땀 크기밖에 이루지 못했다 해도
우리에겐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
365일에 6년을 곱하면, 2000일을 훨씬 넘는다.
남과 비교하는데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집중해서 알차게 채워갈 계획이다.

과연 아들에게도 이 방법이 통할 수 있을까.
결과는 앞으로 5년 뒤 이맘 때 공개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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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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