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21317813_20160120.JPG » 엄마는 ‘나’와 ‘아이’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존재다. 송채경화

책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보면 소설가 레이철 커스크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 나온다. 레이철은 회고록 <생명의 작업>에서 “어머니가 된 후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는 결코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나’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고 썼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저자 스테퍼니 스탈은 이 글을 인용하면서 “어머니로서 우리는 이렇듯 분열된 상태로 사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분열된 상태,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낳은 뒤 오는 정체성의 혼란은 사춘기에 겪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처음엔 조금 놀랐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를 낳으면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니 오히려 내 존재가 더 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신비롭고 새로웠다. 한 생명을 잉태하는 일, 태아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우는 일, 출산, 그리고 젖을 먹여 아이를 살찌우는 일은 나라는 인간의 ‘확장판’이었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존재의 당위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이는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눈물 나는 감정들을 죽기 전에 느껴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24시간 동안 온전히 이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내 몸과 마음을 쏟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이 새로운 세계에 푹 빠져 지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끝 모를 우울감에 시달렸다. 35년간 살아온 삶의 방식을 한순간에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육아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나라는 인간의 확장판은 이전보다 더 쪼그라든 축소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반복적인 노동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늦은 저녁 아이를 재운 뒤 밀린 설거지를 끝내고 겨우 앞치마를 벗는 순간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출산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했지만 동시에 예전의 나는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엔 뮤지션인 남편이 무대에 오른 사진을 보고 질투가 났다. 내 인생은 축소판으로 바뀌고 있는데 남편의 인생만 여전히 확장판인 것 같아 억울했다. 바깥세상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는 내 존재에 대한 불안은 때때로 해고를 당하거나 시험을 망치는 꿈으로 발현됐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행복하다가도 지친 하루를 보낸 뒤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울해졌다. 가끔은 이런 내가 정상의 상태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시험받는 기분이었다. 잠시 아이를 떼어놓고 외출하면 해방감과 동시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빨리 복직하고 싶다가도 하루 종일 혼자 남겨질 아이가 못 견디게 측은했다. 그래서 스테퍼니는 어머니로서 ‘분열된 상태로’ 사는 법을 배운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혼돈을 나 혼자만 느끼는 건 아니라는 것이고, 안타까운 점은 스테퍼니가 얘기했듯이 이러한 분열은 쉽게 봉합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수 이적의 어머니이기도 한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은 비좁은 집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연탄불을 갈던 전업주부 생활을 회상하며 “육아가 즐거웠다”고 했다. 그러다 셋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 자신의 길을 찾겠다고 선언하고 결국 여성학자가 되었다. 그도 분명 인생 사이사이 어디쯤에선가 분열의 상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길’을 찾았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이 글은 한겨레21 제1096호(2016.1.19)에 실린 글입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송채경화
결혼 안 한다고 큰 소리치다가 서른넷에 결혼했다. 아이를 안 낳겠다고 떠들다가 결혼한지 1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 ‘평생 자유롭게 살겠다’던 20대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 하루하루 모성애를 탐구하며 보내는 서른 여섯 초보 엄마. 2008년 <한겨레>에 입사해 사회부, 정치부를 거쳐 <한겨레21> 정치팀에서 일하다 현재 육아휴직중이다.
이메일 : khsong@hani.co.kr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437514/b27/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수
1565 [송채경화 기자의 모성애 탐구생활] 마지막 남은 탯줄을 끊고서 imagefile [3] 송채경화 2016-02-24 33678
1564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아들.. 드디어 졸업이다 imagefile [8] 신순화 2016-02-24 12239
1563 [최형주의 빛나는 지금] 하늘이를 안고 벤치에 누워 낮잠을 imagefile [10] 최형주 2016-02-22 9589
1562 [강남구의 아이 마음속으로] ‘괜찮아’는 안 괜찮아, 대신 ‘그렇구나’ imagefile [15] 강남구 2016-02-22 27333
1561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10대 길목, 딸 변신은 무죄 imagefile [10] 신순화 2016-02-19 22223
1560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방 물건 다이어트, 추억과의 사투 imagefile [7] 윤영희 2016-02-19 19139
1559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다리를 잃는다 해도 겁나지 않을 세상 imagefile [16] 케이티 2016-02-17 12125
1558 [김명주의 하마육아] 자식, 그런 식으로 키우지 마라? imagefile [18] 김명주 2016-02-16 14900
1557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기승전수염 imagefile [13] 홍창욱 2016-02-15 18195
1556 [강남구의 아이 마음속으로] 하늘에서 세상으로 온 아이 imagefile [9] 강남구 2016-02-15 17600
1555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아이와 함께 하는 초콜릿 요리 imagefile [5] 윤영희 2016-02-15 12654
1554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결혼 14년..이젠 설도 만만해졌다 imagefile [3] 신순화 2016-02-12 14602
1553 [앙큼군과 곰팅맘의 책달리기] 승률 100%, 앙큼한 승부사 imagefile [5] 권귀순 2016-02-12 17633
1552 [양선아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이런 날이 오네, 정말 imagefile [6] 양선아 2016-02-11 14226
1551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이런 학부모 회장 봤나요? imagefile [6] 신순화 2016-02-04 16968
1550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애들 생일은 힘들다!!! imagefile [5] 신순화 2016-02-01 13972
1549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수포자' 엄마, 수학 우등생 되다 imagefile [11] 케이티 2016-02-01 13160
1548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공부 다이어트로 아이 성적 올리기 imagefile [5] 윤영희 2016-02-01 20484
» [송채경화 기자의 모성애 탐구생활] 공연하는 남편에게 질투가 났다 imagefile [2] 송채경화 2016-01-27 21416
1546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돈이 모이는 부엌살림 다이어트 imagefile [14] 윤영희 2016-01-22 19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