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방 안에 혼자 섰다. 손 안에는 전날 저녁 늦게까지 혼자서 적었던 자기 소개서가 들려 있었다. 셔츠 밖에 얇은 조끼와 그 조끼를 덮은 웃옷은 그 아이를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키는 나와 비슷하고 체격은 더 컸지만 얼굴은 여전히 엄마 품이 그리운 아이였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된 여러 변화 중 하나는 학교에서 수행 평가를 수시로 한다는 경험이었다. 첫 번째 수행평가 과제로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 소개가 나왔다.

 

“자 시간을 잴게. 발표해 보렴.”
스톱워치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2분 안에 밤늦게까지 적었던 수행 평가 원고를 마무리해야 했다. 시간은 1분이 지나갔지만 아이의 시선과 입은 그대로 였다. 아이는 처음부터 고개를 들지 못했다. 1분이 지나간다고 알려주자 입술은 더 굳게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엔 적막이 더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입을 떼고 싶은 아이의 마음과 스스로 일어서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적막은 그렇게 감싸안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보여준 밝은 모습은 방 밖으로 밀려 나 있었다. 커다란 항아리를 머리에 짊어진 것처럼 줄곧 시선은 땅을 향했다.

 

2분이 지난 뒤 서 있던 아이는 의자에 주저 앉았다. 몸 안에 가득찼던 긴장은 커다란 한 숨으로 나왔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놀라 아이도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서 있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니?”
잠시 생각을 하던 아이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친구들의 시선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게 했다고 했다. 시선이란 범주 안에는 한 쪽 끝에 차가운 시선이 있고 다른 한 편 끝에는 따뜻한 시선이 있을 터인데, 아이가 느꼈을 시선은 어떤 시선이었을지 궁금했다.
“부끄러웠어요.”

 

아이는 친구들의 시선을 느낄 때 부끄러운 감정이 일어났다고 했다. 모든 감정은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감정은 깊게 자리잡은 생각 하나와 만나는데 그 생각을 찾아나서야지만 그 감정이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다 다른 건 그건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유가 뭘까라는 생각을 하다 그 생각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으니까. 원인을 찾고 대안을 찾는 건 문제가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오히려 아이를 더 주눅들게 할 것만 같았다.

 

 “누구나 처음하는 경험은 어색해.”

명동 거리 한 복판에서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기억을 들려주었다. TV 뉴스에서는 마이크를 잡은 기자만 보이겠지만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방송기자와 카메라 기자를 많은 시민들이 둘러싸인 채 지켜본다는 말도 전했다.

 

“동물원의 원숭이의 느낌을 알겠더라고.”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더 실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충분히 부끄러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잘못하는지 친구들이 지켜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실수를 하면 비난을 한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아이는 스스로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관련된 생각을 이야기 했다. 아이는 발표를 하기 전부터 비난받을 거라는 생각이 앞선 모양이었다. 이제 14살이 된 아이는 그렇게 실수를 두려워했다. 실수를 한다는 건 비난 받을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늘어난 학원과 시험에 힘들어 했던 아이는 학교에서 발표하는 일까지도 틀리면 안 되는 시험처럼 받아들였다. 교복을 입은 채로 시험문제를 풀고 틀린 답안을 보며 한숨 쉬었을 아이를 상상하니 가슴 한 켠이 아릿했다.

 

두렵다고 고백한 아이는 오랜 이야기를 나눈 뒤 자기 소개서를 들고 다시 일어섰다. 1분이 지났지만 손에 있던 자기소개서는 얼굴 가까이 올라가지 않았다. 축쳐진 나뭇가지처럼 자기 소개서는 땅을 향해 늘어져 있었다. 다시 2분이 지나자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았다. 다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은 것처럼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 탄성은 평소에 알지 못했던 두려움을 이기고 싶어하는 탄성이었고 그러면서도 그 두려움 앞에 주저 앉은 속상함을 담은 탄성이기도 했다. 아이는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러기를 네 차례. 시간은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선생님 못 하겠어요.”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단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네.”
 “그런데 왜 계속 실수를 하면서도 일어섰니?”
 긴장이 풀려 몸을 늘어뜨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노력해야 하니까요..”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아이는 자신을 노력하는 아이라고 평가했다.

그 평가를 다시 확인해 주고 싶었다.
 “노력하는 아이라고 생각했구나. 그럼 그 아이는 왜 노력을 계속했을까?”
 더 오랜 시간이 흘렀다.
 “노력해서 잘 하려고요.”
 다시 그 평가를 아이에게 되돌려주었다.
 “노력을 한다는 건 잘하기 위한 모습인 거구나.”
아이는 집에서 연습을 한 뒤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더 연습을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을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미국 긍정심리학자이자 상담심리학자인 칼 로저스는 부정적인 감정을 소중히 다뤘다. 그는 “부정적인 감정이 완전히 표현되어야 부정적인 감정이 비워진 자리에 긍정적인 감정이 차오른다”고 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채 억지로 긍정적으로 바꿀 때 그 감정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힌다고 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자신 안에 자신도 모르는 두려운 감정이 있었으며 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은 자신을 더 힘들게 했다는 걸 불편한 시간을 통해 배웠기를 희망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을 꼭 안아주기를 바랐다.

 

그 아이가 설사 발표를 원하는 만큼 못하더라도 그가 좋아하던 마이클 조던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며 메모를 했다.
“나는 계속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다.”- 마이클 조던
실패를 한다는 건 도전하고 있으며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증거라고 말이다.

 

터널의 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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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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