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임신에 놀라 엉겹결에 지은 태명, 곤란이. 이 이름은 우리 부부에게 ‘곤란이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니 이제 ‘곤란해도 괜찮다’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주문을 불어넣어주는 좋은 이름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에 축하한다며 밝은 얼굴로 태명을 물어온 사람들은 ’곤란이’라는 이름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왜 애 이름을 그렇게 짓냐", "애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지금이라도 바꿔라" 등 여러 타박을 들어야 했다.


 친정 엄마는 "결혼 5년만에 가진 아인데 곤란하긴 커녕 너무도 적절한 타이밍"이라며 태명으로 ‘적절이’로 바꾸라고 했다. 평소 사주팔자에 관심이 많은 친구는 "애 인생은 이름 따라간다"며 빨리 태명을 바꾸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때 이미 우리 부부는 ‘곤란이’이란 이름에 정이 들어버렸다. 하여, 온갖 타박에도 ’곤란이’의 이름을 사수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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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미묘한 느낌을 받은 것은 ‘느린 우체통’ 앞에서였다. 임신 8개월 때 우연히 "1년 뒤에 편지를 배달해준다"는 느린 우체통을 맞닥뜨리게돼 곧 태어날 아이에게 편지를 써서 넣었다. 맨 첫 줄에 ‘곤란이에게’라고 써넣으려는데 좀처럼 글씨가 써지질 않았다. 나중에 아기가 보면 서운해 할 것 같고 뭔가 미안하고…. 결국 첫줄에 "아가에게"라고 써버렸다.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원으로 옮겨 신생아실에 아기를 보러 갔을 때는 머쓱한 느낌이 더해졌다. 곤란이 옆으로 쪼르륵 누워있는 아기들은 저마다 행복이, 기쁨이, 밤톨이 등 긍정적이고 귀여운 이름들을 갖고 있었다. 가뜩이나 3.9kg 우량아로 태어나 옆자리 아기보다 훨씬 커보이는 우리 아기가 ‘곤란이’라는 이름표까지 달고 누워있으니 어딘가 안쓰러웠다. 급기야 산후조리원 직원이 이름을 잘못 써 ’골난이’라고 쓴 것은 화이트로 지워 다시 ’곤란이’라고 써 뭔가 추레해 보였다.("태명이 뭐지요?" "곤란이요." "(받아 적으며)골난이요?" "아뇨 골 난 게 아니라 곤란하다, 할때 곤란이요" "골난이요? 골란이요? 아~ 곤란이요?".. 대략 이런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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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인 사건은 며칠 뒤 일어났다. 산후조리원의 한 직원이 심각한 얼굴로 "아기 이름좀 바꿔주시면 안돼요? 부르기가 너무 좀… 그렇네요"라고 말하기에 "아…네"라고 대답하고는 넘겼다. 그런데 수유를 위해 신생아실 문을 열다가 듣고 말았다. 한 직원이에 울고있는 우리 아기에게 하는 말, "곤란아, 너 이러면 정말 곤란해!" 헉,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날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아무래도 아기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에게 곤란하단 소리를 듣게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에게는 곤란이가 태어나면 붙여주고 싶은 이름이 있었다. ‘미르’였다. 미르는 순우리말로 ’용’이라는 뜻이어서 용띠해에 태어난 아기에게 잘 어울렸다. 또한 러시아어로는 평화를 뜻하기도 한단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어림없었다. 시댁 어른들은 곤란이가 장손인만큼 집안의 돌림자인 ’교(敎)’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시아버님께 슬쩍 "돌림자를 안쓰면 안되냐"고 물었더니 "그럼 너네 안본다"는 답이 돌아왔다.


 별 수 있나. 그래서 일단 산후조리원에 있는 며칠동안만이라도 ‘미르’라고 부르자고 결정했다. 다음날 바로 신생아실에는 ’곤란이’라는 이름에 화이트가 칠해지고 그 위에 ’미르’가 덧쓰여졌다. 그 후로도 며칠동안 산후조리원 직원들은 곤란아, 했다가 아니 미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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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출생신고를 위한 이름을 지어야 했다. 남편의 성씨에 남편 집안의 돌림자를 중간에 넣고 나니 정할 것은 마지막 한 글자 뿐이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낳았는데 이름에 나의 흔적은 없는가? 그렇다고 애 이름에 또 내 이름 중 한 글자를 넣는 것은 너무 기계적이었다. 고민 끝에 찾았다. "빈(彬)’자 였다. 내 성에 있는 수풀림(林)자가 섞여있으니 아주 조금 위안이 됐다. 그래봤자 나의 성씨도 아버지의 것이니 결국 가부장적인 흐름은 그게 그거긴 하다. 아무튼 그리하여 곤란이, 아니 미르는 다시 교빈이가 되었다. 일부는 작명소에서 음양오행을 따져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야단이었지만 이미 지었는데 별 수 있나. 다행히 무료 이름풀이에 넣어보니 좋은 이름이란다.


 내 배에서 미끄덩 하고 나온 생명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어찌나 어렵던지. 이름 하나 짓는데 주변 시선부터 집안의 압력까지 너무나도 신경 쓸 것이 많다. 무수한 시선을 받으며 이름을 짓는 과정은 때로는 기쁨이요, 때로는 스트레스였다. 꽃이라 불러줘야 비로소 꽃이 된다는데 아이에게 적절한 이름을 지어준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기야, 네 이름이 무엇이든지간에 엄마아빠에게 넌 정말 적절한 때에 태어나준 귀엽고 귀한 ‘곤란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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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선 기자
<한겨레21> 기획편집팀, 사회팀, <한겨레> 사회부 24시팀을 거쳐 현재 오피니언넷부에서 일하고 있다. “결혼 생각 없다”더니 한 눈에 반한 남자와 폭풍열애 5개월만에 결혼. 온갖 닭살 행각으로 “우리사랑 변치않아” 자랑하더니만 신혼여행부터 극렬 부부싸움 돌입. 남다른 철학이라도 있는양 “우리부부는 아이 없이 살 것”이라더니 결혼 5년만에 덜컥 임신. 노키드 부부’로 살아가려던 가련한 영혼들이 갑자기 아기를 갖게되면서 겪게되는 좌충우돌 스토리를 나누고자 한다.
이메일 :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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