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 문.jpg

 

토요일엔 큰 아이가 다니는 대안학교에서  김장이 있었다.

백오십 포기의 김장을 학부모들이 모여 함께 하는 큰 행사였다.

아이들은 남편한테 맡기고 나 혼자 학교에 들어간 것이 오전 10시 무렵..

학교의 넓은 거실엔 이미 많은 엄마 아빠들이 와서 재료를 다듬고 있었다.

수다를 떨어가며 동료 엄마들과 무채를 썰고 나서 오전 중에 버무려진 김칫속에

삶은 돼지고기로 맛나고 푸짐한 점심도 잘 먹었다.

본격적으로 배추에 속을 채워넣기 전에 화장실을 들리려고 했더니

1층 화장실엔 전기 난로가 연결되어 있어 문을 닫을 수 없었다.

2층 화장실로 갔다.

문을 닫으려고 했더니 빡빡해서 잘 닫히지 않았다.

그래도 문을 안 닫는 것은 찜찜해서 별 생각없이 힘 주어 문을 닫고 볼일을 보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화장실 문이 안 열리는 거다.

어지간히 힘을 주어 손잡이를 돌려도 문은 꼼짝 하지 않았다.

한동안 애를 써보다가 할 수 없이 문을 쿵쿵 두드렸다.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문이 안 열려요' 소리를 쳤다.

'그래요?'

밖에서 힘주어 손잡이를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금방 열리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원래 잘 열리지 않는 문이어서 요령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잡아 당기면서 열어보라고

밖에서는 온갖 주문을 했지만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안에서 잠근 건가? 몇 번이나 확인을 했지만 아니었다.

문 손잡이가 고장이 나서 헛돌고 있었다.

'손잡이를 아예 분해해야  겠는데? 문짝을 그냥 부숴도 될까? '

여러 아빠들이 모여 의견이 분분했다. 뭘 어떻게 하든 빨리 나가고 싶었다.

열쇠다발이 나오고, 작은 칼이 등장하고, 밖에서는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혹시 창으로 나갈 수 있나? 하고 봤더니

창은 일부만 조금 밀어서 환기만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간다 해도 밖은 2층이었다.

옆으로 앞 건물과 이어진 통로가 있었지만 그 역시 닿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 통로로 아이들이 몰려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모.. 뭐 하세요? 이모.. 안 열려요?'

아이들은 이런 상황이 재미난 모양이었다. 처음엔 나도 신기했다.

그렇지만 10분이 넘어가자 재미는 모두 증발해 버렸다.

 

핸드폰도, 책도 없이 이렇게 좁은 공간안에 갇혀 본 일은 처음이었다.

화장실이라는 곳이 책 들고 들어앉으면 한 시간도 더 있을 수 있는 곳이지만

그거야 따끈한 온열 시트가 깔려 있는 우리집 화장실 얘기지, 이렇게 썰렁하고

살풍경한 학교 화장실처럼 볼일만  바로 보고 나가는 곳은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차가운 욕조 가장자리에 엉덩이만 조금 걸터 앉았다.

만약 어른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이렇게 갇히게 되었다면 정말 난리가 났겠지?

애가 안에서 울기라도 하면 밖의 어른들은 정말 안절부절 할 것이다.

당장 문 고치는 사람을 부르지 않고 어떻게든 아빠들이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도

갇힌 사람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인 때문이겠지.

 

만약 이렇게 사람이 많이 있을 때가 아니라 혼자 학교에 들렀다가 갇히게 되었다면

얼마만에 구조가 되었을까?

이 건물은 길가에서 쑥 들어온 곳에 있고 화장실은  2층 구석에 있어서 어쩌면

한참 걸렸을지도 몰라. 앞집에 주인이 살고 있으니 소리치면 들리겠지만

이렇게  추운 겨울에 문을 꼭 닫고 텔레비젼이라도 보고 있다면 내 소리가 안 들릴지도

모른다. 핸드폰도 없는데 만약 그럴 경우 이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갔다.

물도 있고 볼일을 볼 수 도 있으니 험한 꼴은 안 당하겠지만 저체온증이 올지도 몰라.

마른 수건이 몇 장 있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응급구조 프로그램에선 겨드랑이에 양 손을 끼고 몸을 웅크려서 체온 손실을 줄이는 것이

살 확률이 높다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있어볼까?

 

시간은 2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밖에서는 문을 아예 부수고 있는 모양이다. 손잡이는 덜렁거려 밖이 흘깃흘깃

보이는데 걸쇠처럼 문틀에 들어가 있는 쇳덩어리는 빠질 기미가 없다.

 

아이 키우다보면 이런 일 한번씩 겪을 수 있지.

가만... 나도 우리 아이들 어릴적에 이렇게 갇힌 적이 있던가? 필규는 방에 한 번

갇혀서 열쇠 찾느라 온 집안을 뒤졌던 기억이 있구나.

동서 얘기로는 우리 신랑도 결혼 전에 명절날 온 가족이 강릉 집에 모였다가

어린 조카가 화장실에 들어가 문이 잠겨 못 나오는 바람에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지.

애는 울고 어른들은 우왕좌왕하고, 열쇠 고치는 사람을 부르자는 서방님과

급하니 우선 안방쪽 창문으로 나가 화장실 창으로 들어가겠다는 남편과 시비가 붙어

화가 난 우리 신랑이 그 길로 다시 차를 타고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가버렸다는

일화가 있었다는데... 울 신랑, 퍽 다혈질이었구만.

 

하여간에 다행이다. 애가 아니라 내가 갇혀서..

하긴 아파트를 떠나고 싶었던 것도 늘 애들 손 잡고 엘레베이터 탈 때마다

갑자기 멈추어 그 안에 갇히는 생각에 항상 두려웠기 때문이지.

폐쇄된 좁은 공간에 갇힌다는 상상만해도 숨이 다 막혀온다.

그래도 여긴 하늘도 보이고 막힌 곳이 아니라서 다행인데...

춥구나.. 춥구나..

맨손체조도 해 보았다가.. 이것도 별로 좋지 않다는 얘기가 생각나 그냥

동그마니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엄마 중 한 명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공구를 가져와주십사 한 모양인데

금방 오겠거니 했던 남편은 오지 않았다. 나중엔 문이 안 열리는 것 보다 마누라가 갇혔다는데

금방 달려오지 않는 남편이 더 미웠다.

이 인간이 걱정이 안  되는 모양이구만.. 흥, 그러다가 열리겠거니 하는거렸다? 다른 남편들도

많으니 어찌어찌해서 열어 주겠거니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겠지.

흥.. 필규가 갇혔는데 못 나오고 있다면 당장 달려오지않았을까?

이거 점점 남편이 원망스러우면서 애가 더 소중한가, 마누라가 더 소중한가에까지

생각이 미치려는 찰라 벌컥 하며 문이 열렸다. 30여분이 흐른 다음이었다.

 

허위허위 내려와 난로옆에 털썩 앉았다.

동료 엄마들이 다가와 애썼다며 팔을 주무르는 시늉도 해주고 따끈한 커피도 내 오는데

진짜 걱정하는 표정보다는 우스워죽겠다는 표정들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 같다.

그 사이 김장은 얼추 다 끝나 있었다.

하기 싫고 귀찮다고 여기긴 했는데 그래서 벌 받았나?

화장실에 30분 갇혀 있을래, 김장 같이 할래 하면 당근 김장 하겠다.

 

올 김장은 내 화장실 사건까지 곁들여 풍성한 이야기 거리를 남기고 끝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화장실에 들어갈때도 핸드폰을 챙겨야 하나를

심각하게 따져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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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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