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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키우는 일이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없이 미루는 일이기도 하다.

육아가 좋아서 기꺼이 선택했고, 결혼 8년 동안 세 아이를 키우는 일을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나도 사람이기에 가끔은 육아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꿈꾸게 된다.

거창한 것도 아니다. 아주 사소한 것, 별 것 아닌 것,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세 아이 키우는 엄마에게는 이루기 힘든 소망이 되고, 가슴에 품어 보는 로망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작정하고 넋두리를 하려고 한다.

이름하여 ‘엄마로 사느라 못 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쯤 되겠다.



우선, 정말로 마음껏 자보고 싶다.

눕고 싶을 때 눕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일... 정말이지 너무 너무 해보고 싶다.

어린 아이 키우는 일이란 내 잠과의  싸움이다. 나처럼 젖 먹이고 천기저귀 쓰는 엄마라면

더 그렇다. 밤중에도 젖 물리고, 중간 중간 일어나서 기저귀를 갈다보면 잠이란 늘 너덜너덜

이어붙인 조각보가 되고 만다. 중간에 깨지 않고 밤새 통째로 잠을 자 보는 일, 소원이다.

주중에 바쁜 남편은 주말이면 꼭 낮잠을 자는데, 나는 그게 정말 부럽고, 밉다.

나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애 키우는 일이라는 게 주말이 따로 있을리 없다. 주중에 열심히

키웠으니 주말만큼은 쉬겠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처지가 이런데 주중에 열심히 회사 다녔으니

주말엔 푹 쉬고  싶어하는 남편이 야속할 따름이다.



그 다음으로는 밥 좀 편하게 먹고 싶다.

맛난 음식을 찾는 게 아니다. 그냥 밥에 김치만 있는 상이라도 편하게 앉아서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느긋하게 먹고 싶다. 세 아이 키우며 밥을 해 먹는 일은 늘 전쟁처럼 지나간다. 보행기도, 아기의자도

싫어하는 젖먹이를 한 팔에 안고, 다른 팔로 야채 데치고, 무치고, 볶아가며 상을 차리고 나면

그 다음엔 젖먹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내 입에 밥 넣어 가며, 네 살 아이 수저 위에 반찬도 올려줘야 하며

큰 아이 먹는 것도 챙겨야 한다.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정신 없이 삼키는 일이다. 맛을 음미하고 어쩌고 하는 것은

애시당초 가능하지도 않다. 널을 뛰듯 입에 넣고, 부지런히 삼켜가며 배를 채워야 한다. 그나마

제 때에 밥을 먹을 수 있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애써 다 차려 놓으면 그제서야 졸리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젖 물려 가며 재워야 하기가 일쑤다. 남편과 두 아이들이 밥을 다 먹고 난 다음에야 상에 앉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도 막내가 아빠에게 안 가려고 하면 또 안고 먹어야 한다.

애 키우면서 먹고 살기... 정말 힘들다.



폼 나는 옷, 입어 보고 싶다.

결혼 8년간 세 아이를 낳았더니, 임신 기간만 2년 6개월이고, 첫 아이 24개월 둘째 아이 27개월

그리고 7개월째 젖 먹이고 있는 막내까지 수유 기간만 3년을 향해 가고 있다. 임신과 수유에서

벗어난 시절에도 늘 손이 가는 어린 아이가 있다보니 내 옷차림이란 언제든 아이를 안거나

업기에 편한 옷, 애들 때문에 갑자기 얼룩이 묻어도 아깝지 않을 옷, 움직이기 편하고

튼튼하고, 빨기 쉬운 옷이 기준이 된다. 여기에 굽이 낮고 실용적인 신발이 필수다.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 하늘한 원피스라던가,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라던가, 단추가 조르르 달린

몸에 꼭 맞는 셔츠라던가 하는 것들은 그림에 떡이다. 명품이 아니라도 그럴듯한 백조차 사치다.

아이들 데리고 다니면 필요해지는 물건들로 가득한 커다란 가방이 몸에서 떠날 새가 없다.

목걸이나 귀걸이, 반지 따위도 어림없다.

가끔 거리에서 폼 나는 옷에 명품 백, 최신 유행의 킬힐을 신고 어린 아기를 안고 가는 엄마를

보기도 하는데, 분명 그 엄마는 모유를 먹이지도, 천기저귀를 쓰지도 않을 것이다. 나처럼 아무때나

아이와 부비고 살을 맞대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들과 스킨쉽 하는데 방해가 되서 화장도 안 하고

입술에 립스틱조차 안 바르고 살아온 게 몇 해던가.

내가 원해서 이러고 살고 있지만 마음 속에 욕망마저 없는 건 아니다. 나도 멋지게 차려 입고

폼 나게 다녀보고 싶다.



문화 생활 좀 여유있게 누려보고 싶다.

극장에 앉아 영화 보기, 느긋하게 미술관 돌아다니기, 우아하게 레스토랑에서 음식 먹고

카페에서 편하게 수다떨고, 서점에서 책 삼매경에 빠져보고, 각종 공연과 연주회 기웃거리고

몸과 마음을 살 찌울 강연과 각종 강좌에 참석해 보는 일... 간절하게 원하고 또 원하는 일이다.

한 살, 네 살, 여덟 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는 늘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읽어 주고,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을 가야 한다. 그런 일이 즐겁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보고 싶고, 내가 가고 싶고, 내가 듣고 싶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많다.

그러나 늘 아이들이 곁에 있으니 모두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처녀적엔 영화도 좋아했고, 인사동 찻집을 누비며 맘에 드는 찻집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긴

일기를 적기도 했던 나였다. 무료 공연, 강좌를 꿰고 다니며 주말에는 그런 것들을 즐기느라

바빴다. 영화제, 패스티벌, 각종 행사 같은 것들도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지금은 추억 속에 아스라하다.



휴식 같은 여행, 떠나고 싶다.

세 아이 데리고 시댁 가는 일 말고, 나만을 위해 내가 좋아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여행... 항상 소망한다. 처녀적엔 정말 잘도 돌아다니던 나다. 중고 소형차에 도로지도 한 권 싣고

그야말로 발 길 닿는 대로 다녔었다. 그런 여행이야 꿈도 안 꾸지만 쉴 수 있고, 재충전 할 수

있고, 위로가 될 수 있는 여행이 그립다. 아이들 옷이며 기저귀가 가득찬 가방들을 싣고, 도로가

밀리면 짜증내는 아이들 달래가며 여행 한 번 다녀오면 휴식은 커녕 몸살이 날 지경이 된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들이 소중하지만 아이가 많으면 여행도 스트레스가 된다.

나도 가끔은 휴가를 받아서 나만의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언제쯤 가능할까?...



하긴 이런 목록들도 거창하다.

이 정도 아니라도 좋다. 그냥 오랜만에 전화해 준 친구와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으면 좋겠고

목욕탕에 더운 물 받아 놓고 느긋하게 들어앉아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 아니 그냥

화장실에서 볼 일 볼 때 문이라도 닫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막내가 깨어 있으면 보행기를 화장실

문 앞에 가져다 놓고 거기에 앉힌 다음 노래 불러주며 볼 일을 본다. 어흑...)

조간신문 끝까지 읽기, 재미있는 책에 정신없이 빠져 보기, 밥 안 먹고 싶을 땐  밥 안하기,

(내가 밥 먹기 싫어도, 밥 하기 싫어도 애들이 보채면 꼼짝 못한다. 밥 해서 대령해야 한다.)

한 일주일쯤 청소따윈 신경 안 쓰고 살아보기 (이틀만 정리 안 하면 집안은 카오스, 그 자체가 된다)

대중 목욕탕에 가서 목욕해 보기 (결혼 8년 동안 첫 아이 있을 때까지 대여섯 번 가본 게 고작이다),

내 속도대로 걸어보기(늘 어린 아이 발걸음에 맞추어 걷다보니 내 보폭도 잊어 버렸다),

길거리 쇼윈도우에 정신 팔아 보기(3분만 서 있으면 아이들이 빨리 가자고 난리다), 맘 놓고

가게에 들어가 옷 골라보기(어린 아이 데리고 옷 사러 가는 일... 불가능 그 자체다. )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보기 (애가 깨어 있는 시간엔 절대 불가능하고, 애가 자고 있으면 내가

불가능하다. ㅜㅜ), 이런 거 정말 하고 싶다.



아니다. 다 필요 없다. 그냥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보낼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

마음껏 게으름 부리고 뒹굴거리고 시체놀이 할 수 있는 그런 날 좀 있으면 좋겠다.

아아아... 정말 좋겠다.



좋아하는 영화 한 편 맘 놓고 보지 못하고, 입고 싶은 옷도 못 입고, 술 한잔 편하게 마실 수 없고

친구도 못 만나고, 배우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고, 하다못해 잠도 실컷 잘 수 없는

세 아이 키우는 엄마라는 자리...

그렇지만 내가 목록에 적어 놓은 모든 것들과 세 아이들을 바꾸자고 하면 절대 안 바꾼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아이들을 선택한다. 생각할 것도 없다.

잠 못자고, 몸은 늘 고단하고, 늘어진 옷에선 젖 냄새가 가실 날이 없어도 나는 지금의

나와 내 아이들과 엄마인  내 자신이 좋다. 결론이야 뭐 이렇게 뻔하다.

‘엄마로 사느라 못 하고 있는 것들’도 수없이 많지만, ‘엄마로 살아서 누리고 있는 것들’도

셀 수 없이 많기에 이 노릇을 놓지 못한다.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 입고 우아하게 미술관을 거니는 날이 20년 후 쯤에야 가능하다 하더라도

지금은 열심히 젖 물리고, 기저귀 빨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엄마의 날들을 살아야지.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도 욕심껏 늘려가며 품고 있어야지. 이 다음에 꼭 다  해야지.

애 키우면서도 배우고, 익히고,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더 좋을테니,

조금씩이나마 그런 사회로 나갈 수 있도록 엄마로서의 목소리도 높혀 가야지.

그러니 참말로 할 일이 많구나.



이 사회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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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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