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혼자서 상상하며 흐뭇해 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며, 아내 품에 안긴 갓난아이에게 "집이다. 이제부터 살게 될 우리집이야"하고 말한다. 양손엔 아기 용품으로 가득한 가방과 장바구니가 각각 하나씩. 아내는 비록 초췌하지만 얼굴에 미소를 보인다. 카메라 패닝하며 집안 전경을 훑자 거실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모습. 창가에는 싱그러운 화분이 서너 점 실루엣을 만든다.(^^)

…임신의 끝은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이다. 지금까지는 둘이 살던 집이었지만, 진통이 와서 병원을 다녀온 뒤에는 셋이 사는 집이 된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셋이 됐음을 결국 확인하는 순간. 상상만 해도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상상 속 흥분은 공유했을지언정 아내의 반응은 달랐다. 내가 그저 흐뭇해 하는 동안, 아내는 열심히 현실적인 준비를 했다. 배냇저고리와 우주복(아마도 준비해본 사람만이 알만한), 속싸개, 겉싸개, 모자, 손싸개, 발싸개, 방수포, 베개 등등등등이 왜 필요하고, 얼마나 있어야 하며, 어떤 제품이 좋은지 고민했다. 욕조와 침대, 유모차, 모빌, 인형은 어떤 게 적절한지 찾아보고 돌아다녔다. 젖병과 기저귀, 가제수건, 턱받이 등 본인이 써본 지 30년은 된 생활용품의 쓰임새를 되새겼다.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에게 뭘 해줘야 할지에 대해 아내는 잘도 알아내고 찾아냈다. 아내의 정보는 책과 인터넷, 그리고 먼저 임신했던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알아온 것들이었다.

  그러기를 몇주, 어느덧 집 한 켠에 아이를 위한 공간이 마련됐다. 한쪽 벽에는 송아지와 돼지와 강아지가 풍선에 매달려 구름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내가 땀 뻘뻘 흘리며 조립한 침대와 기저귀교환대도 임자를 기다리며 서있다. 내 손바닥이나 겨우 덮을 듯한 천조각들이 '옷'이란 이름으로 정성스런 아내의 손빨래를 거쳐 가지런히 비닐팩에 정돈돼있다. (솔직히 자기 옷도 저렇게 꼼꼼히 정리하진 않았다.) 옷 챙긴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장모님은 아내가 갓난아이 시절 입던 배내옷도 갖다주셨다. 삼십년을 건너뛰어 엄마와 아들이 나눠입는 옷이라니!

  지금까지는 많은 것이 상상과 현실을 오가고 있다. 뱃속 아기가 현실이면, 아이가 태어난 뒤의 상황은 상상이다. 그때 입을 옷을 마련한 것은 현실이다. 그 옷을 입은 모습은 상상이다. 배를 퉁퉁 걷어차는 태동이 현실이면, '얘는 축구선수가 되려나'의 호기심은 상상이다. 그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 중에 정점은 아이의 생김새다.

 
0.jpg » 10주 태아의 초음파 사진.  임신 초중반 초음파 사진에서 보는 아이의 모습은 형이상학적이다. 의사선생님이 이건 어디고 저건 어디고 하고 설명을 해줘도, 비교적 분명해 보이는 팔다리가 아니고서야 어찌 생김새를 알까. 처음에 찍은 초음파 사진은 강낭콩 같았고, 그 다음에 찍은 사진은 젤리인형 같았다. 그 몇 개의 현실적 단서를 가지고 우리 부부는 '다리가 길다' '코가 오똑하다' '머리통이 예쁘다' 등 상상의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꿈에서 아이와 뛰어노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나도 아들이라 인식했던 그 아이. 들판에서 까르르 대며 함께 신나게 구르고 뒹굴며 놀았다. 꿈에서 깨어나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얼굴 봤어? 어떻게 생겼어?"라고 물었다. 그러고보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봤는데, 봤는데, 어떻게 생겼더라….

  꿈에서 본 아이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우리 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기회가 왔다. 얼마 뒤 임신 28주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입체초음파 사진엔 나를 쏙 빼닮은 아이가 아내 뱃속에 있었다. 너무 닮아서 나도 흠칫 놀랐다. 얌전히 잠들어있는 아이의 모습은, 대학 시절 친구가 찍어준 나의 자는 모습 사진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눈물이 났다. 고백컨대, 같이 계시던 장모님이 "똑같지? 그렇지?"하고 물어보실 때 내가 대답을 못했던 이유는 목소리에 감동의 울먹임이 섞일까 하는 걱정 탓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상상은 그치지 않을게다. 아이가 예쁜 짓을 해도 미운 짓을 해도 "얘가 뭐가 되려나" 하는 얘기를 할 땐, 그건 부모의 상상이다. 임신 막바지가 되니 지금까지보다는 한층 현실로 다가선 느낌이 든다. 물론 '아직 멀었다'며 나무랄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 이 글은 지난 2010년 첫 아이 출산을 앞두고 개인블로그 '소년적 호기심'(blog.hani.co.kr/oscar)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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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이메일 : oscar@hani.co.kr      
블로그 : http://plug.hani.co.kr/osc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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