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넘은 아빠에 스며든 신생아 수면 주기를 극복하고 ‘쓰읍, 찹, 쓰읍, 찹’ 밤의 육아에 도전하다
“밤을 책임지겠다.”
장인·장모님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돌봄의 왕들이 귀환할 때까지 야간 육아를 맡겠다고 선언했다(‘입’육아가 아니라는 건 두고 보면 알 일). 주어진 시간은 4주, 아내의 불안은 당연했다. 아내의 구원투수는 늘 장모님이었다. 기회를 달라는 육아빠 희망자를 향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실전이다. 연습 삼는 것은 거부한다”는 아내의 원칙은 분명했다. 이제 이유식 실패를 딛고, 레알 육아빠의 대열로 도약할 절호의 찬스였다. 아드레날린이 솟아올랐다.
이날부터다. 아내는 늘 그렇듯 목욕 뒤, 기저귀를 갈고, 수면등을 켜면, “동구 밖 과수원길”을 무한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날은 나도 밀린 집안일을 일단 미루고, 아이 옆에 누웠다. 매일 그래왔다는 듯, 함께 토닥토닥, 무리한 화음을 넣었다. 고향의 과수원길이 어떻게 생겼더라….
그때, 저 멀리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왜 자?” 신생아 수면주기가 마흔 넘은 아빠의 몸 안에 스며든 것이다.
시작이 부진하다고 주눅 들지 말자. 다행히 나는 잠귀가 밝았다. 아이가 보채는 소리에 엄마보다 먼저 일어났다. 아이에게 다가가니 ‘이 양반이 무섭게, 오늘따라 왜 이래’ 하는 표정이다. 더 크게 운다. 여느 때처럼 아내가 스윽 일어나 품에 안는다. 동시에 “혹시, ◯◯◯ ◯◯◯ 가능할까요”라며 빠르고 구체적으로 메뉴를 읊었다. 이가 시려 정신이 달아날 정도의 찬물 한 통, 적당히 따뜻한 물이 담긴 아이의 물병, 여름용 기저귀, 아이의 입을 닦을 물티슈. 달빛에 의지해 주섬주섬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아이는 잠들었다. 4주가 이렇게 가면, 안 된다.
기회는 남아 있다. 밤은 길다. 혹여 깨어날 여명이 찬스다. 매일은 아니니, 꼭 잡아야 한다.
“마, 마, 앙!”
벌떡 일어났다. 새벽빛이 뿌옇다. 아내는 일어나기 힘겨워 보였다. 아이를 안아올렸다.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어디서 들었는지(봤는지) 족보를 알 수 없는 비법, 스쿼트이다. 이래 봬도 퍼스널 트레이닝까지 받은 몸. 하지만 아이의 백일이 지나고 수면시간이 늘면서 잠시 접어둔 상태였다. 중단한 이유는, 간단하다. 40년산 무릎이 시려서다. 아이는 커갈수록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낮게, 더 오래라며 온몸으로 신호를 보냈고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 이날도 칭얼거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쓰읍, 찹, 쓰읍, 찹…. “옷도 안 입고 뭐하느냐” “아이 정신없겠다” “꼭 티를 낸다”는 아내의 중얼거림에도 중단할 수 없다. 여기서 멈추면 아이는 아마 ‘처음부터 다시’를 외치듯 울기 시작할 것이다. 장담한다. 효과는 있다. 스쿼트는 달리 운동의 왕이 아니다. 아이와 긴 시간을 보내지 않는(못하는) 육아빠가 아이를 잠들게 하는 기능도 탑재한 게 스쿼트이다. 일단 아이의 울음은 잦아들었다.
“현관등 친구야/ 너는 정말 착하구나/ 내가 올 때마다/ 나를 비춰주니까.”
쓰읍, 찹, 쓰읍, 찹, 스쿼트 중간에 마법의 노래를 피처링했다. 작사·작곡 김혜영. 우리 장모님이시다. 1년 전, 새벽에 우는 아이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초보 엄마·아빠 앞에 홀연히 나타난 장모님. 아이를 안아올려, 현관 쪽으로 향했다. 약속한 듯 번쩍, 등이 들어왔고, 세상에 기적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물러나면 꺼졌다, 다가가면 켜졌다, 그 리듬에, 아이는 잠이 들었다. 그때, 장모님의 입에서 주술처럼 구원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안의 전설요, ‘현관등 친구’는 이렇게 태어났다. 쓰읍, 찹, 쓰읍, 찹…. 현관등…, 친구야….
하어영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