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fb5200c1f972d5e74d57ae7013a473d. »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아빠의 소임을 다 하기로 맹세하였다.






큰아들. 철부지 어린 동생들 건사하고 부모님께는 극진히 효도할 것 같은 큰아들. 이름만 들어도 든든하다.

그러나 요즘 엄마들이 말하는 ‘큰아들’은 어째 든든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주말에 ‘동생들’ 돌보기는커녕 낮잠만 실컷 자고, 또 가족의 건강까지 위협한다는 ‘구름과자’는 왜 그리도 즐기는지... 이땅에 족보도 없고 호적도 없는 ‘큰아들’이 더 이상 양산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난 아내와 연애를 하면서 향후 결혼생활의 이념으로 ‘호혜평등주의’를 역설했다. 한국 사회의 가족제도에서 남성의 기득권은 여전히 공고하기 때문에 결혼을 주저하는 여자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그러니 내가 벌충해 주겠다. 가사? 육아? 왜 여자만 해야 하느냐. 남자도 당연히 분담해야 한다. 평일에 퇴근이 늦어 기여를 못하면 휴일에는 빨래부터 청소·요리까지 풀 서비스로 보답하겠다. 내가 남자가 아닌 여자의 입장에서 결혼 제도를 바라봤을 때에 느끼는 불안감과 불합리를 나는 생활 속에서 이렇게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따로 노는 법.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들’이었다. 결혼 전까지 날마다 아침을 챙기고 와이셔츠를 빨고 다리고, 또 계절이 바뀌면 옷장을 정리한 사람은 내가 아닌 어머니였다. 30년이 넘는 시간을 ‘아들’로 살았기에 남편 또는 가장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지만 아내는 틈을 주지 않았다. 주말에 늦은 아침을 먹고 청소하기 전에 잠깐 쉬고 있으면 아내는 “청소 한다며?!!”라며 쏘아붙였고, 분명히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고 마음 먹었는데 아내는 “음식물 쓰레기좀 버려!!”라며 닦아세웠다.






학창 시절 텔레비전 앞에서 ‘요것만 보고 공부하자’고 생각하고 있는데 “너 왜 공부 안하냐”고 힐난하는 어머니의 잔소리와 똑같았다.  아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결혼할 때 한 약속 안 지키냐. 나 속인 거냐”며 발언 수위를 더욱 높였다. 나중에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지만,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는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뱉은 독설은, 지고는 살아도 무시당하고는 못사는 내 가슴에 비수 같이 꽂혔고, 그로 인해 싸움도 제법 했다.






그러나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아내의 ‘독설’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 안에서 조롱받고 비난당해 의기소침해지면 바깥에서의 경쟁은 해보나마나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집안에서만큼은 최고의 아빠, 최고의 남편이어야 했다. 가장의 권위는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야 하는 법. 아내가 엄마 같은 ‘잔소리’를 쏟아내기 전에 한 발 앞서 먼저 움직였다. 받을 줄만 알았던 ‘아들’이 이젠 줄 줄도 아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된 것이었다.






일단 남편이 되고 나니, 아빠가 되는 일은 더 쉬웠다. 세상 밖으로 머리 내밀기를 거부한 녀석의 똥고집 탓에 1박2일 동안 산통을 겪어야 했던 아내는 출산 뒤엔 손목과 꼬리뼈의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고 아이를 안을 수도 없었다. 출산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내를, 사지 멀쩡한 내가 당연히 도와야 했다. 때마침 이뤄진 편집팀 발령은 아빠로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져다줬다. 아내보다 늦게 출근했고 저녁 8시30분이면 퇴근했다. 주말에는 아침 일찍 아이와 함께 일어났고 아내는 늦잠을 자게 했다. 그렇게 나는 녀석을 키웠다.






물론 육아와 가사에 참여하며 부처님 같은 자비심과 평정심을 항상 유지할 수는 없었다. 엄마들이 ‘큰아들’ 바라보듯이 늦잠 자는 아내에게 약이 올라 이따금 짜증을 내기도 했다. 또 너무 육아에 얽매여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있다는 우울함을 느끼기도 했다. ‘피아노를 치고 싶다. 드럼을 배우고 싶다. 직장인 밴드 활동을 하고 싶다. 야구 동아리에 가입하고 싶다. 헬스클럽에 다니고 싶다. 영어회화를 능숙하게 하고 싶다. 그런데 못한다.’ 그러나 결론은 결혼과 출산으로 기회를 잃은 건 나뿐만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다. 애들 다 키우고나면 여유가 생기겠지... 






가장의 권위를 유지하는 일도 고되기만 하다. 평일에는 일하느라 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는 그런 이유로 가족에게 더욱 노력 봉사한다. 쉴 틈이 없다. ‘가뜩이나 기자들 단명한다는데, 이렇게 하다간 더 빨리 죽겠네...’ 머릿속에서 이런 걱정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 숙명이라는 것.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의 숙명.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가족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다. 다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 물론 “고맙다”는 아내의 진심어린 말 한 마디는 내게 박카스고, 녀석의 필살 애교는 내게 비타500이다. 어깨가 무거워도 그맛에 웃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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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블로그 : plug.hani.co.kr/dok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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