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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부터 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차리고 있다.
열두살 큰 딸과 아홉살 막내딸이 번갈아 나와 같이 부엌일을 한다.

밥을 먹자 마자 제가 쓴 그릇들을 거두어 가서 설거지를 해 놓던 오빠가 기숙사에 들어간 후
딸들은 밥 먹고 설거지 하는 것들을 슬슬 미루기 시작하더니 어느결에 나 혼자 하고 있다.
학교 수업 후에 이런 저런 방과후 활동을 하고 친구둘과 놀기도 하다가 집에 들어오면 오후 5시가
넘곤 하는데 이때쯤 되면 배고프다고 다들 아우성이다.
아이들 없는 동안 집안일에 밭일에 이런저런 일들로 고단했던 나도 배 고프고 피곤하기는 똑같다.
그런데 딸들은 집에 오면 가방을 던져두고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쉬거나 책을 보거나 피아노를
두드리며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나는 서둘러 부엌에 들어가 저녁식사 준비를 하느라 바쁜데 심부름을 시켜도 딸들은 굼뜨고 더뎌서
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음.... 이건 옳지 않다.
두 딸을 불렀다.
"밥은 모두 다 먹는데 그 밥을 차리는 일은 엄마 혼자 하는 것은 불공평해.
같이 만들고, 같이 먹고 같이 치워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집안 일은 '엄마일'이 아니야. '여자일'도 아니고 가족 모두의 일이지. 학교에, 직장에 있는 동안에는
엄마가 하지만 다 같이 있을때는 다 같이 해야하지 않을까?  배 고프고, 쉬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나
엄마나 똑같애. 같이 차리고, 같이 쉬자. 어떻게 할래?"
딸들은 하루씩 돌아가면서 저녁 차리는 일을 돕겠다고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상을 차리고 치우는 것은
다 같이 하기로 정했다.

첫 날은 이룸이였다.
이룸이는 내 지휘를 받으며 압력솥에 밥을 앉치고, 된장찌개를 끓였고, 채소를 씻었고,
삶은 빨래들을 헹구어 탈수를 했고,그릇들을 정리했다. 아홉살이지만 나이 차가 많은 오빠 언니 밑에서 단련된 아이라 손끝이 야물다. 말귀도 잘 알아 듣는다.
어설프게 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제대로 배워야 하는 일인만큼 몇 번씩
다시 해 보이며 이야기해 주었다. 그럭저럭 이룸이는 잘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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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윤정이 차례였다.
저녁 반찬은 두부김치과 채소쌈, 그리고 오이무침이다.
먼저 신김치를 볶았다. 내가 꺼내온 김치를 윤정이가 썰었다. 양파와 당근은 내가 도와주었다.
우묵한 팬에 기름을 두르고 김치와 채소들을 넣고 볶는다. 중간에 들기름과 설탕을 약간 넣는다.
달달 볶아 내 놓고 채소를 씻었다. 텃밭의 채소들은 신선하지만 진딧물이며 이런 저런
벌레알이 있어서 베이킹파우더를 푼 물에 담궜다가 흐르는 물에 살살 흔들면서 꼼꼼히 씻어야 한다.
건성 건성 해대는 윤정이는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엄마 곁에 있을 때 제대로 배워. 다른 사람한테 배우는 일이 더 힘들테니까..
채소 씻는거,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이런 사소한 일도 제대로 해 내려면 여러가지를 알아야 해."
윤정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손길은 영 서툴고 거칠다. 당연하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전까진 조금 찢어진 채소들을 먹게 될 수도 있다. 상관없다.

                

다음엔 오이무침.
오이를 주고 썰게 했더니 깍둑 깍둑 두께가 제각각이다. 윤정이는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하지 않고
설렁설렁 하다보니 허술한 구석이 많다. 손에 익으려면 오래 걸리겠다.
굵은 소금 뿌려 살짝 절인 후 내가 불러주는대로 양념을 넣고 버무렸다. 양념들이 재료와 겉돌지
않으려면 요령있게 버무려야 한다.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수없는 일 들이다.
조금 짠 듯 해서 매실청을 슬쩍 넣었더니 먹을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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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를 중탕하려면 두부를 넣은 그릇이 통째로 들어가는 넓은 냄비를 찾아야 한다.
중탕하는 냄비엔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어느정도 끓여야 중탕이 되는지, 다 된 뜨거운 그릇은
어떻게 꺼내는지, 그 그릇안에서 두부는 또 어떻게 꺼내는지 직접 보지 않고는, 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다. 전자레인지를 안 쓰는 내 부엌에서는 두부 하나 중탕하는데도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한 김 식힌 두부를 윤정이가 썰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재료도 반듯하게 썰기가 힘들다는 것을
꺠달으며 윤정이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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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김치에 깨를 뿌리고, 오이 무침을 담고, 채소옆에 쌈장을 챙겨 내 놓고 거실에 작은 상을 폈다.
이룸이가 수저와 그릇을 꺼내 차렸다. 반찬을 나르고 밥을 푸고 앉기까지 세 사람 모두 제 몫을 했다.

잡곡밥과 두부김치, 오이무침, 텃밭 채소와 쌈장, 그리고 숭늉이 놓인 소박한 밥상에 두 딸과 앉았다.
모두가 함께 차린 밥상이다.
                

"이룸아, 이거 언니가 무친 오이인데 맛이 어때?"
"음.... 먹을만 하네요"
꽤 깐깐한 평을 내 놓는 이룸이였지만 오이무침은 언니보다 더 많이 먹었다. 제 입에서 맛있었던
모양이다.
"윤정아. 식사준비 해보니까 어때?"
"정말 힘들어요"
"그래. 힘들어. 한끼를 두 사람이 같이 준비하는데도 힘들어. 그런데 이 일을 한 사람이, 하루에 세번씩
1년 365일을 한다면 어떨까?"
"힘들어 죽을꺼예요."
"맞아. 당연히 힘들지. 그러니까 모두가 같이 해야지. 같이 먹는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해야지.
처음엔 오이 하나 써는 것도 잘 안되고 어렵지만 이틀에 한번씩이라도 계속 하다보면
중학생 정도 되면 재료만 있으면 간단한 반찬과 밥은 척척 만들어 낼 수 있게 될거야. 엄마가
도와줄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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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이는 윗밭에서 뜯어온 깻잎에 볶은 김치와 두부를 올리고 밥과 쌈장을 얹고 부추까지 한 줄기
얹어 쉼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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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완전 맛있어요. 정말 꿀맛이예요. "
"그래, 엄마도 정말 맛있어. 진짜. 너희들이랑 같이 하니까 더 맛있고...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교 나와서 돈 많이 버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먹을 반찬 하나
못 만들고, 밥도 못 짓고, 떨어진 단추 하나 제대로 못 꿰매는 사람 많아. 그런 사람은 결코 어른이라고
할 수 없어. 어른이라면 자기가 먹는 음식은 스스로 만들고 차려서 먹을줄 알아야 해.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먹을 것을 벌고, 자기가 먹을 것을 만들고, 차리고, 치울 수 있어야 어른이지.
엄마는 너희가 그런 어른이 되기를 바래.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공부가 바로 스스로 먹고 사는 공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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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짱 맛있어요. 최고예요"
커다란 쌈을 가득 넣은 이룸이가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서 다들 크게 웃었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돌아오면 학원 숙제로 요즘 초등학생들은 수면시간도 부족하다는
글을 읽었다.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공부하는 일만 하느라 밥 짓는 것도, 국 하나 끓이는 것도, 부엌 살림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떻게 사용하고 정리하는지도 배울 틈이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반조리 식품이 널렸고, 다 썰어있는 재료들이 한끼 씩 포장되어 있어 돈 주고 사오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니까 걱정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 해 내는 일을 자본에 의지하다 보면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건강이 상하는
것도 물론이다.

학교 배움도 중요하다. 다양한 친구를 사귀고 여러 경험들을 쌓아가며 성장해 가는 일도 소중하다.
그러나 공부중에 제일 중요한 공부는 스스로 지어 먹는 공부다. 내 일상을 내가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기본적인 기술들을 익히는 공부다. '살림 공부'를 해야 한다.
부모 곁에 있을때 살림을 배우게 하자. 햇반과 배달음식으로 배를 채우게만 하지 말고
소박한 음식이라도 스스로 만들어 먹는 기쁨을 아는 어른으로 키우고 싶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그런 공부도 시킨다. 아들은 학교에서 같이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고
같이 사는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딸들은 아직 어리고 내 곁에 있으니 내게서 배우면 된다.

매일 두 마리 개들 밥을 챙기고, 닭장에서 알을 꺼내오고, 텃밭에서 채소를 뜯어오고, 쌀을 씻고
그릇을 꺼내고, 이부자리를 켜고 개키고, 빨래를 정리해서 넣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식재료를 살피고, 음식물 쓰레기를 거름간에 버리고 오고, 설거지를
하는 일들을 하며 조금씩 조금씩 살아가는 데 필요한 소중한 일들을 익혀간다.
살림을 가르쳐 주는 일을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엄마로서 내가 아이들한테 줘야할 가장
중한 배움으로 여기겠다.

맛있는 밥, 든든히 먹었다.
살아갈 힘이 듬뿍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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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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