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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고 한판 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다들 늦잠을 작고 일어난 금요일, 딸들과는 과일로 아침을 대신하고 점심은 아들을 깨워 같이 먹으리라 생각했다. 오후 한 시부터 아들을 깨우는데 여간해서 꿈쩍 하지 않는다. 생각같아선 굶든 말든 우리끼리 차려 먹고 도서관으로 가고 싶지만, 그냥 두면 두 세시 넘어 일어나 라면으로 허기를 때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테니 밉지만 밥 한끼 먹이려고 집안 떠나가게 아들을 깨웠다.
집에 있는 네 식구가 다 모였으니 오늘 꼭 해야 할 일들을 나누어 처리하자고 생각했다.
흙투성이가 되어 수북이 쌓여있는 목장갑들을 빨아야 했고, 개똥으로 지저분해진 데크 물청소도 해야 하고 닭장에도 가봐야 했다. 각자 자기 먹은 그릇을 씻은 후에 일을 나누었다. 아들과 이룸이는 데크 청소, 나와 윤정이는 닭장과 목장갑 세탁을 맡았다. 아들은 귀찮은듯이 꾸역꾸역 막내를 데리고 데크로 나갔다. 나와 윤정이는 흙투성이 목장갑을 대야에 담아 물과 세재를 넣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흙물이 한 없이 나왔다. 빠는 김에 곧 개학이니 실내화주머니와 실내화도 세탁하자고 딸에게 일렀다. 윤정이는 동생것까지 가지고 와서 옆에서 빨기 시작했다.
필규와 이룸이는 데크 청소를 다 하고 들어와 쉬는데 빨래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애써 주물러도 흙물은 끝없이 나왔다. 세탁실은 덥고 좁았다.

"필규야, 빨래가 안 끝난다. 닭장은 니가 가봐야겠어"

이게 시작이었다.
"네? 저는 데크 청소 하고 왔잖아요, 닭장은 엄마랑 윤정이가 한다면서요"
"그랬는데 장갑 빠는 일이 너무 힘들어. 아직도 안 끝났어. 윤정이는 실내화도 빨고 있고..
그러니까 니가 좀 가서 계란좀 꺼내와. 물도 챙겨주고.."
"그걸 왜 제가 해요. 전 물청소 하고 왔다구요"
아들은 소파에 퍼질러 앉아 억울함을 호소한다. 쪼그리고 앉아 더러운 장갑 빠는 일이
힘들어 죽겠는데 제 일은 다 끝났다고 뻗대는 아들이 얄미웠다.
"엄마랑 윤정이 일이 안 끝나잖아. 시작해보니까 힘이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려.
닭장은 니가 좀 갔다와"

아들은 세탁기 소리와 물소리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도 없는 분노의 말들을 잔뜩 쏟아 놓고는
막내를 데리고 사라졌다가 잠시 후에 나타나 다시 선풍기를 틀어 놓은 소파에 앉았다.
간신히 빨래를 마치고 탈수통에 넣은 후 부엌으로 들어가 분리수거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현관앞에는 진작에 쓰레기 수거장으로 나갔어야 할 폐휴지며 비닐 쓰레기 봉지가 여럿이다.

"자, 다들 이거 하나씩 들고 쓰레기장에 다녀와"

거실에 앉아 있는 세 아이를 향해 말했다.
"네? 그건 엄마가 좀 하시죠?"
아들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 말에 나는 폭발했다.

"뭐라고? 그런 엄마가 좀 하시라고? 엄마가 지금까지 놀고 있었니?
계속 일 하고 있었잖아. 아직도 하고 있고.. 그런데 엄마가 좀 하시라고?
너는 뭘 했는데? 얼마나 했는데?
하루 반나절 자고 일어나서 뭘 얼마나 했는데? 기껏 데크 청소하고 닭장 갔다 온거?"

"그럼 엄마가 닭장에 가서 더러운 계란 꺼내와 보세요, 얼마나 힘든가!"

"엄마는 힘들고 더러운 일 안 하고 놀았니? 니가 한 번 흙투성이 장갑 수십켤레 빨아볼래?
도대체 방학동안 제일 게으르게 니 멋대로 지내온 녀석이 어떻게 말을 그 따위로 해!
니가 뭘 얼마나 했다고.. 집안일은 가족 모두 같이 하는 거야. 엄마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엄마가 다 하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할 만한것만 시키는 건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동생들은 니가 자고 있는 동안 더 많이 했어. 니가 식구 중에서 제일
덜 하고 있잖아. 자느라고.. 그런데 뭐라고? 그건 엄마가 좀 하시라고?"

한번 터져나온 감정은 식을 줄 몰랐다.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 내내 세 아이랑 집에서 지내는 동안 아들은 언제나 하루 반나절,
때론 그 이상을 잠으로 보내왔다. 아들만 조금 도와주면 수월한 일이 많은데.. 싶으면서도
그냥 두었다. 크느라 힘든데, 학교 다니는 동안 고단했는데, 그래 방학이라고 맘껏 자게 하자는
마음이었다. 동생들은 일주일에 세 번 수영도 다니고 방과후 프로그램도 있고, 나와 매일
도서관을 다녔지만 반 나절 자고 일어난 아들은 저녁때 우리가 돌아올 때 까지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곤 했다. 그러는 줄 다 알면서도 그냥 두었다. 저 나이게 컴퓨터 게임이 얼마나 하고
싶을지, 밤 새워서라도 하고 싶을 그 마음 알아서 그냥 두었다. 동생들도 이해해 주었다. 아들이야말로 가족중에 제일 많은 배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그건 엄마가 좀 하시죠'라니, 참을 수 가 없었다.

"더럽고 냄새나는 쓰레기. 니가 한번이라도 분리수거 해 봤니? 엄마가 다 해 놓으면 너는
들고 옮겨만 놓잖아. 데크청소? 닭장 갔다오는거? 그게 고작인데 그게 그렇게 힘들고
많은 일이니? 이 집에서 살고 싶으면 집안일을 다 같이 하지않고는 안돼. 가족이면
같이 일하고 같이 쉬어야지. 엄마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너만 선풍기 앞에 앉아서 쉬는게
그게 공평한거야? 엄마도 똑같이 쉬고 싶어. 그러니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끝난 사람이 도와서 함께 쉬게 해야지. 그게 공평한거고 그게 가족이야고!!"

폭포처럼 쏟아내는 내 말에 아들은 핏발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딸들은 말없이 쓰레기 봉지들을 나누어 들고 언덕길을 내려가 쓰레기수거장에 두고 왔다.
아들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며 앉아 있었다.
딸들이 들어오고 나는 탈수된 목장갑들을 꺼냈다. 그 사이 아들은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
2층으로 가서 마른 빨래를 걷어 양손 가득히 들고 와 거실에 부려 놓았다

" 각자 자기 빨래 개키고 수건이랑 걸레랑 행주같은 것들은 똑같이 나눠서 개켜놔"
"똑같이 안 나누어지면요"

아들이 날서린 목소리로 던졌다.
"그런건 놔 두든지, 누가 마음 내 주는 사람이 해 주던지"

나는 쏘아 붙이고 2층으로 올라가 장갑을 널었다. 가슴속의 화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내려와보니 셋이서 빨래를 개키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나는 이 사건을 글로 쓰고 싶어
재빨리 사진 한 장을 남겨 두었다.)

아이들이 개켜놓은 수건들 중 제대로 각이 나오지 않은 것들은 다시 펼쳤다.

"수건 하나 똑바로 개킬 줄 몰라선 안돼. 다 니들이 쓰는 수건이잖아. 조금만 신경쓰면
반듯하게 개킬 수 있어. 할줄 모르면 엄마가 있을때 옆에서 배워. 필규는 이제 고교과정 들어가면
공동생활 해야 되잖아. 엄마 잔소리 들으면서 배울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기본적인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돼. 너도 더 불편해지고.."
딸들은 수건을 목욕탕에 가져다 넣었다. 아들은 제 빨래만 개켜 가너져다 놓고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었다.

"필규야. 가족은 같이 사는 사람들이야. 집안일도 같이 해야지. 어른만 해서도 안되고 너희들도
각자 자기 일을 하고 같이 해야 할 일은 같이 하고... 그게 가족이야. 한 두 사람이 고생해서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지내는건 가족이 아니야. 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역할과 몫을 찾아서 같이 해야지.

엄마도 배 고픈데 한없이 너희들 시중드느라 밥상에 앉지도 못하고 부엌에서 동동거리다보면
속상하고 슬퍼. 니 나이가 되면 여전히 쉬고 있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살필 줄 알아야돼.
어떻게 도우면 그 사람 일이 끝나서 다 같이 식탁에 앉고 다 같이 쉴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가족이지.. 알았니?"

아들은 한참 뜸을 들이다
".. 네" 라고 대답했다.


필규4.jpg


사춘기 아들 움직이게 해서 집안일 돕게 하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난다.
그냥 나 혼자 하는데 더 빠르고 쉽다.
돌아가며 저녁을 준비하는 것도 여동생들은 알아서 시키는대로 잘 한다.
그런데 아들 차례였을때는 정말 쉽지 않았다. 일부러 아들이 좋아하는 부대찌개를 준비했는데
아들은 햄 깡통 뚜껑 따는 것 조차 서툴렀다. 뚜껑을 따 주었더니 이번엔 내용물을 못 꺼내서
쩔쩔맨다. 간신히 꺼내고 나서는 어떻게 썰어야 하냐고 투정이다.
햄을 썰고, 두부와 양파를 썰고 느타리버섯을 찢어 놓는데 평소에 내가 들이는 시간의
세 배쯤 걸렸다. 그중의 절반 이상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이젠 양념장을 만들어줄래?"
"계량스푼 어디있어요?"
"조리도구 넣는 통에"
"후추는요?"
"씽크대 양념칸 열고 허리 숙여서 안쪽을 찾아봐"
"간장은 양조간장이예요, 조선간장이예요?"
"조선간장.. 안쪽에 있어"

나 혼자 하는게 백번 편하다.
일일이 손에 쥐어주고, 알려주고, 도와주다보면 평소에 30분이면 끝날일이 한시간도 더 걸린다.
그렇지만 굳이 번거롭고 힘들고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을 애써가며 한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이라고 경험해보라고
굳이 이렇게까지 한다. 집안에 양념이 어디에 있는지, 엄마가 없어도 최소한 양념을 찾을 수 는 있게 굳이 굳이 힘들게 이렇게 한다.

전 과정을 제 몸으로 겪어보지 않은 일은 그 일의 수고를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수고란 머리로 알아지는게 아니라 몸으로, 시간으로 알아지는 것이다.
밥 한끼에 들어가는 수고를 아는 남자로 키우고 싶다. 그래서 누군가 차려낸 한그릇의
음식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독립된 개인이라면 제가 먹는 음식을 장만할 줄 알고, 제가 입은 옷은 스스로 세탁하고,
제가 사는 공간을 혼자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본적이고 사소한 일을 꼭 누군가의 수고에 의지하거나 자본을 빌려 해결한다면
그건 어른이 아니다. 자라지못한 아이일 뿐이다.

그런 사람 안 만들고 싶어 오늘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아들과 싸우고, 어르고,
달래고, 설득하며 굳이 이렇게 산다.

언젠가 아들이 커서 이 글을 읽는다면 부끄럽고 어이없고 혹은 화가 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단하지 않은 일들을 굳이 저와 싸워가며 같이 같이 했던 엄마의 마음과 뜻을
뒤늦게 이해해줄지도 모르겠다. 그때 알아도 좋다.
부디 남에게 자신에게 폐 끼치지 않는 인간으로 커 다오.
나와 같이 사는 동안에는 조금 더 싸우고, 조금 더 애써보며 굳이 이렇게 지내보자.
한 사람의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워내는 것이 엄마의 가장 큰 책임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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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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