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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모처럼 두딸과 수영장을 찾았다.

한창 수영이 늘어가는 딸들과 자유수영을 하러 온 것이다.

딸들이 장난 반 수영 반을 하는 동안 나는 성인 라인에 들어가 25미터 풀을

스무 번쯤 왕복했다.

폭염에 장마에 지쳐서 체력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틈틈히 근육운동을 했던 효과가

있는지 좀처럼 지치지 않아서 신나게 물살을 갈랐다.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동네의 단골 카페에 들러

팥빙수와  차가운 레몬쥬스 하나를 주문했다.

이쁘게 크는 딸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나서 유쾌한 수다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일어서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딸들은 쥬스가 나오자마자 서로 먼저 먹겠다고 티격태격 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커피나 음료가 양이 많기로 유명해서 쥬스도 둘이 먹기 충분할 만큼

넉넉한 잔에 나오기에 하나만 시켰다. 나는 찬 음료를 안 마시기도 했기에

아이들만 나눠 먹으면 되겠지 했던 것이다.


두 아이가 서로 제 쪽으로 끌어 당기려다 잔이 살짝 출렁거렸다. 나는 조금 언짢아졌다.

그래도 다시 화기애애하게 팥빙수를 먹으려는데 이룸이가 빨대로 쥬스를

빨아먹으며 장난치다가 빨대에 남아있는 쥬스를 테이블과 내 치마위에

뚝 뚝 흘려 버렸다.  열이 훅 솟았다.

 

좀 얌전히 먹자..

 

다독이며 다시 팥빙수를 떠 먹는순간 이룸이가 너무 많이 먹었다며 제 쪽으로

성급하게 쥬스잔을 끌던 윤정이가 그만 잔을 엎질러 버렸다.

남아있던 레몬 쥬스가 금새 테이블을 가로질러 윤정이 원피스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윤정이는 당황하고 놀래서 얼어버렸다.

 

아... 이런... 진짜...

세네살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것들이 쥬스 한잔을 제대로 못 마시나,

유치하게 싸우고 샘내고 그러다가 폐만 끼치고.. 아, 정말..창피하게..

 

평소에 아이들이 정말 의젓하고 이쁘게 큰다고 칭찬하던 주인장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속상하고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엄마가 조심하랬지.. 하는 표정으로 화를 억누르며

윤정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내 눈초리에 윤정이는 더 어쩔줄 몰라했다.

친절한 여주인이 행주를 들고 달려와 괜찮다며 웃는 얼굴로 치우는 동안에도

나는 지그시 화를 참고 윤정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테이블을 치우자마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나왔다.

윤정이도 입이 댓발은 나와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잖아"

끝내 딸에게 한소리를 해 버렸다.

"내가 그런게 아니예요. 이룸이가 안 주니까.."

"그렇게 얘기하면 안돼. 니 실수로 엎은거잖아. 일단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게

순서지.. " 나는 큰 딸에게 쏘아 붙였다. 큰 딸은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기분이 확 상해서 집에 들어왔다.  마당에서 힘든일을 한 모양인지

땀으로 범벅된 남편이 씻는 사이 수영장에서 가져온 물건을 정리하느라 집안을

오가고 있는데 해태가 계속 짖었다.

 

"물이 없나보다. 필규야, 물 좀 주고와"

소파에 앉아있던 큰 아이에게 일렀다.

"엄마가 주셔야죠"

"엄마, 지금 들어왔잖아. 정리하고 있고.. 네가 좀 해"

"엄마가 뭘 하셨는데요? 수영장 가서 지금까지 있다 왔잖아요. 그동안 내가 다 했다구요."

안그래도 화가 나 있던 마음에 아들이 불을 확 질렀다.

 

보나마나 아빠가 힘든 일을 하는 동안 돕지도 않고 선풍기 켜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젼만 봤을 텐데 제가 다 했다고?

 

"네가 뭘 했는데? 아빠랑 풀이라도 뽑았니? 지금까지 티비만 봤잖아.

주말이라고 하루에 반나절은 늦잠으로 보내고 일어나면서 집안일을 뭘 얼마나

했다고 그렇게 얘기해?"

 

"뭐라고요?"

아들은 눈썹에 힘을 주고 나를 노려보았다. 

사춘기에 들어서 좀 컸다고 가끔 이렇게 무례하게 굴 때는 정말 오만정이 다 떨어진다.

카페에서부터 속상하고 화가 나 있는 윤정이는 이룸이와 집에서도 계속

투닥거리고 있었다.  다들 정말 꼴 보기도 싫었다.

빨래를 너느라 2층에 갔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가 없었다.

집안은 덥고 티비 소리는 2층까지 들린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놓고 아들은 성질을 부리며 개한테 물을 주고 와서는

또 예능 프로를 보며 히히덕 거린다.

 

도대체 속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밭에서 일할때 입는 긴팔 옷과 바지를 챙겨 입고 나왔다.

"뭐 할려고, 저녁 다 됐는데.."

 

마루에서 아이들과 티비를 보면서 남편이 물었다.

 

"윗밭에 가서 풀 뽑을거야. 비 그쳤을때 조금이라도 뽑아야지"

"그걸 왜 지금해. 저녁때라 풀모기 극성이고 뱀도 나올텐데.."

"그럼 아랫밭을 뽑든지"

"다음에 하게 들어와. 저녁때 무슨 풀을 뽑아"

 

나는 남편의 말을 들은척도 안 하고 밖으로 나와 장화를 신었다.

 

"하지 말라고!!"  남편은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아마도 마누라가 남편한데 대드느라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맘대로 오해하라지. 어짜피 나도 다 맘에 안 든다고!!!


씩씩 거리며 호미를 들고 퇴비장 주변에 무성한 풀들을 향해 땅을 파헤쳤다.

비가 계속 와서 물 먹은 땅이라 금새 흙이 얼굴로 튀어 올랐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맘에 드는게 하나도 없다. 아들도 딸도 남편도 다 밉다.

제 잘못은 한번도 시원하게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는 큰 딸이나,  제일 안 움직이면서 뭐 하나 시키면 계산적으로 따지고 드는 아들이나, 조목조목 말대꾸하는 막내나 다 지긋지긋하다.

풀뿌리들은 억세게 땅을 쥐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호미를 휘둘렀다.

다 밉고 싫었지만 사실은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카페에서 놀라고 당황하던 큰 딸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내 기분보다 딸을 먼저 보살펴야 했다. 우선 일어나서 아이를 진정시키고

젖은 옷도 살펴보고 주인장과 같이 상황을 수습하는 것을 도와야 했다.

열한 살이라는 나이가 어린 나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다.

쥬스잔 엎지르는게 대단한 잘못도 아니다. 두 아이가 다투기 전에

잔 하나 더 달라고 해서 애초부터 나눠주었더라면 생기지도 않았을 일이다.

내가 사려깊지 못했다. 어른답게 처신하지도 않았다. 그거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만 신경쓰느라 애들 마음을 살피지 않았다. 그리고도 온통 딸만 야단쳤다.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스트레스가 많아 언제나 방어부터 하고 보는 큰 딸인거

알면서 그래서 실수 했을때 더 당황하고 어쩔줄 몰라 하는 거 다 알면서 나서지 않았다. 

이러면서 무슨 멘토입네 하는거야,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 어른이면서 나는 도대체 언제쯤 철이 드는걸까..


징그럽게 달려드는 풀모기떼와 싸우며 쉬지않고 호미질을 하는 동안

땀은 비처럼 온 몸으로 흘러 내렸다. 무덥고 습한 공기속에 긴 옷을 입고

몸을 움직이니 금방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온 몸에 꽉 차 있는 이 분노와 속상함때문에 힘이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런 순간, 살다보면 있지 않은가.

땀이라도 푹신 흘려야 몸이 비워질 것 같았다.

한 시간 넘게 호미질을 한 풀밭은 금방 이발을 한 것처럼 말끔해졌다.

비로소 온 몸에 꽉 차 있던 감정들이 스르르 빠져 나갔다.


그날 밤 두 딸들을 재우기 위해 불을 끈 거실에 누워서 나는 큰 딸에게 사과를 했다.

"아까 카페에서.."

"엄마, 그 얘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

"아냐, 들어줘. 엄마가 너희들한테 크게 잘못한게 있어서그래. 사과하고 싶어서..

쥬스잔 엎지른거, 쥬스 먹느라 티격태격한거.. 니들 잘못 아니야.

애초에 두 잔을 주문했거나, 두 잔으로 나눠줬으면 되었을 것을 엄마가 생각이 짧았어.

그리고 또 그런걸로 아웅다웅하고 그러다가 엎지르기도 하고, 그런게 아이다운거지.

누구나 그럴 수 있는건데 엄마가 너무 화만 내서 미안해.

윤정이가 엎질렀을 때 엄마가 먼저 일어나 괜찮냐고 물어보고 서둘러 치우는 것을

도왔어야 했는데 화만 내고 있었잖아. 정말 어른스럽게 못한 행동이었어.

계속 엄마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한다고 화만 내고 있었어. 너희들 돕지도 않고

보살피지도 않으면서.. 윤정이가 당황하고 놀란거 다 알면서도 살펴주지도 않고, 실수한 아이한테 더 화를 내고...엄마가 정말 미안해. 그러면 안되는건데..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마음 아프게 하고.."

 

윤정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룸이도 훌쩍 거렸다.


"너희들은 정말 숨만 쉬고 있어도 너무 이쁜 아이들인데, 우주에서 제일 이쁜

애들인데 엄마가 가끔 너무 욕심을 부려. 미안해. 엄마도 계속 실수하고 배우는

사람이라 아직 부족해서 그래. 더 노력할께"

 

"아니예요. 엄마도 전 은하계에서 제일 멋지고 착한 엄마예요"

 

나는 울다가 이룸이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제일 멋지고 착한 엄마는 아니고 가끔 아주 못된 엄마잖아.

그래도 노력할게. 다만 엄마의 모습에서 뭔가 배운다면 그때는 그런 생각 못 했더라도

시간이 지났더라도 잘못했다고 느껴지면 그때라도 엄마처럼 얘기해줘.

늦게라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게 안하고 마는거보다 훨씬 나아.

엄마가 겪어보니까 정말 그래"

 

"네.. 엄마.. 그렇게 얘기해주셔서 고마와요. 엄마.. 사랑해요"

 

윤정이는 나를 꼭 끌어 안았다.

나도 두 딸을 꼭 끌어 안았다. 눈물진 얼굴로 웃으며 윤정이는 잠이 들었다.

사방에서 풀벌레들이 우는 여름밤이었다.


호미2.jpg


일요일과 월요일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다시 화요일.. 쏟아지는 햇볕속에 말끔해진 윗 마당이 환하다.

계기야 어떻든 그날 풀을 뽑길 잘 했다. 성질내며 호미를 휘두른 덕에

그 다음날 심하게 담이 와서 한 이틀은 끙끙거리며 어깨를 써야 했지만

성질 못되게 쓴 벌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움직였더니 오늘은 좀 살만하다.


어른이라고 늘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건 아니다.

아니 자주 정말 자주 어른들은 아이보다 못하게 유치하고 못 되게 행동한다.

높은 어른들도 그렇다.

어른이어서 잘못을 안 하는게 아니지만 어른이라면 잘못이라고 느꼈을때

그 잘못을 어떻게 사과하고 되돌리려고 노력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그게 더 많이 산 사람들의 도리다.

수해가 난 지역구를 버려두고 외유를 떠난 도의원 중에 반성은 커녕

국민을 비하하고 변명에만 급급한 사람을 보면서 나이들고, 책임있는

자리에 앉았어도 철 들게 행동하기는 정말 어려운 모양이구나..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철딱서니 없고 부족한 엄마지만 애들하고 지지고 볶으며 또 이렇게

깨닫고 배워간다.  다음에는 좀 더 낫게 행동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비 지나가니 폭염이다.

윗밭의 풀은 정말 정리해야 하는데 날이 좋아지니 몸이 귀찮아진다.

미뤄두었던 일에 확 힘쓰는 것은 역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달려들때라야

되는건가...

요즘은 다시 애들이랑도 남편이랑도 사이가 좋아져서 부비부비하기도 바쁜데..ㅋㅋ


아아. 풀들은 어떻게 되겠지.

게으름 부리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으면

그때는 달려들겠지.

그래도 다음에 호미질 할땐 성질부리면서 힘주지 말아야지.

내 어깨도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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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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