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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으로 이어지는 큰 길가 한 옆에 '무인판매대'가 있다.

원래는 아흔이 훨씬 넘은 농부 할아버지가 가꾼 농산물을 파는 곳이었다.

그날 그날 나오는 농산물이 다른데 주로 호박이나 가지, 오이, 고추같은 것들이

한 무더기씩 놓여있고 한 옆에는 담아갈 비닐을 담은 통과 돈 통이 있었다.

허술한 판매대에는 소박한 글씨체로 이곳에서 파는 농산물의 종류와

가격이 쓰여 있는데, 그 가격이라는게 정말이지 너무나 저렴하다.

뭐든지 한 무더기에 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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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운영하는 곳일까 궁금해하다가 어느날은 마악 농산물을 가져다 놓고

돌아서는 할아버지를 뵙고 인사드린 적이 있었다.

허리가 굽은 자그마한 그 분은 무려 아흔 여덟살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매일 밭에 나가 일을 하고 계셨다.

너무 싸게 파시는 거 아니냐고 말씀드렸더니, 비싸게 팔면 뭐해,  천원에 가져가도

고맙지 하셨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수구리고 밭둑을 걸어가셨다.

평생 일 해오신 정직하고 수고로운 한 인생을 대한것 같은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아이들과 나는 그 무인판매대를 '백세 할아버지네 가게'라고 불렀다.


오랬동안 모습을 뵐 수 없어 궁금해하던 할아버지는 100세를 앞두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역시 고령인 아들에게 들었다.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제 이 판매대는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의 자손이 운영하고 있다.

할아버지 때 부터 써 온 돈통도 그대로고, 간판도 그대로다. 물론 가격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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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이들과 걸어서 학교갔다가 혼자 돌아오는 길에 판매대를 들려 보았다.

이쁘고 반들반들한 애호박들이 천원, 그 옆에는 하지감자가 10킬로에 만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집 밭에도 감자를 심었지만 잘 자라지 못했다. 늦게 심기도 했고 날도 너무 가물었다.

그늘이 많이 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쁘게 키운 좋은 감자를 10킬로에 만원밖에 안 받다니...

이만큼 채우려면 몇 고랑이나 파야 할까. 밭에서 캐고, 상자에 담아 가져오기까지

들어간 수고는 또 얼마나 클까.

내가 해 봐서 아는 일이라 더 마음이 쓰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감자 한 상자를 들고 왔다. 애호박도 한 무더기 담아 왔다.


무인판매대3.jpg


오늘은 반질반질 윤이나는 가지가 나왔다. 이 만큼에 천원이다.

천원을 돈통에 넣고 가지를 챙기는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가지농사도 참 어렵다. 몇 번 심었다가 포기했다. 물도 많이 먹고, 무엇보다

벌레가 많이 꼬였다. 이렇게 이쁘게 키우려면 수없는 정성이 들어야 한다.


언젠가 판매대 앞을 지나다가 정말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고급 승용차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내린 여자가 한 무더기에 고작 천원인

채소들을 뒤적거리더니  더 좋은 것들만 골라 담는 것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커피도 최소한 3-4천원은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과 정성으로 키운 귀한 농작물을 겨우 천원밖에 안 받는 이 귀한 것들을

함부로 뒤적이고 좋은 것들만 골라갈 생각을 차마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 가게가 아니지만 참을 수 없을만큼 화가 났다.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되는거다.

그다음부터는 설마 돈을 안 내고 가져가는 사람도 있을까?  돈통도 너무 허술해 보여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떤 수고와 정성으로 나오는 것인지 알기에 그 마음이 온전히 지켜지지 못할까봐

나까지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수리산 도립 공원 등산로와 저수지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안고 있는

우리 동네엔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큰 삼거리 입구에서 그날 그날 수확한 농산물을 파는 할머니네

가게가 있다.

하루종일 채소를 다듬고 판매대를 지키는 수고가 있어 무인판매대보다는 조금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신선하고 좋은 농산물을 살 수 있어 우리가족도 자주 이용한다.

그런데 가끔 진상인 손님들이 있다.

할머니가 고심해서 나누어 놓은 채소 무더기들을 자기 맘대로 섞어서 싸 달라고 우기거나

고작 몇 천원인 농산물을 사면서 '덤'이 없냐고 묻는 손님들이다.

그것도 싸게 판 거예요.. 라고 하면, 시골 인심이 이렇게 야박하냐고 한소리씩 한다.

할머니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추 몇 개, 오이 몇 개를 더 얹어주기도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속에서도 천불이 난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안 팔겠다고  손에 들린 봉지를 뺐고 싶어진다.

이렇게 좋은 농산물을 먹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집 앞에 텃밭에서 우리 아이들이 애지중지 키우는 딸기가 익었을때 지나가던

등산객이 똑 따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남의 밭의 것을 왜 따 먹냐고 소리질렀더니

"이 동네, 인심 한번 사납네" 하며 사과는 커녕 인상을 쓰고 지나갔다.


아파트 숲을 잠시 떠나 한적한 농촌 마을로 놀러왔을때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신선한 작물들, 조금 사도 넉넉히 얹어주는 인심,  지나가다

아무 밭이나 들어가 잘 익은 방울 토마토와 딸기 한두개 정도 따 먹기도 하는 낭만일지 모른다.

그것은 절대 '낭만'이 아니다. 낭만일 수 없다.

그 딸기는 잘 익을 때 까지 수없이 밭을 드나들며 아이들이 아끼던 딸기였다.

낭만삼아, 추억삼아 손을 대서는 안되는 누군가의 소중한 작물인 것이다.

할머니네 채소 가게에 나오는 농산물은 할머니 할아버지 내외가 정성껏 가꾸는 것들이다.

학교 오가는 길에 늘 뵙는 그 분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애쓰는 농부들인지 잘 안다.

그렇게 힘들게 가꾼 채소들을 종일 자리 지키고 앉아서 팔아봤자 기껏 몇 만원 버는 것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참 속상한 일이다.


외지인들이 드나들면서 손을 타는 밭들이 많아졌다.

기껏 가꾼 것들을 누군가 다 털어 간 것을 확인하는 마음이 얼마나 쓰릴지 헤아릴 수 도 없다.

그 사람들 대부분 마트에서 몇 천원 하는 과자나 간식거리를 살때는 아무렇지 않게 돈을

쓰는 사람일 것이다.

왜 낭만과 인심은 시골 동네에서만 기대하는 것인가.

모든 도시인이 다 나쁠리는 없으나 나 역시 도시에 살때, 한 번씩 이런 곳에 와서

여유를 누릴때 맘 편히 시골의 낭만과 인심을 기대하지 않았던가... 돌아보고 있다.

자신의 삶이 아니고 그저 스치는 풍경일때 우리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이

누군가의 정성과 수고를 헐값에 요구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인심조차 요구하고 강요하게 하는 것이다.


돈 천원으로 마트에 가면 살 수 있는게 거의 없는 세상이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한 사람의 땀과 정성으로 가꾼 귀한 호박, 가지, 고추들을 넉넉하게 살 수 있다.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감사하고 귀한 일이다.

내는 돈은 천원이지만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돈으로 결코 따질 수 없는, 매겨지지 않는

귀한 정성이다.


오늘 저녁엔 가지반찬을 해야겠다.

살짝 쪄서 양념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고, 기름에 볶아 먹어도 맛있다.

이 가지를 키운 손길에 감사하며 잘 먹고 더 건강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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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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