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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있었던 초등4학년 큰아이 반의 마지막 수업참관일.
이날의 주제는 국어도 수학도 음악발표도 아닌, <1/2 성인식>.
새봄이면 5학년이 되는 이 아이들이 이제 만 10살이 되었으니,
그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1/2 성인식을 각 반마다 치르기로 한 모양이다.
교실 뒤쪽과 복도쪽에서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차례대로 나와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거나 자신의 장기와 꿈에 대해 발표를 했다.
아이들은 잔뜩 긴장한 듯 보였지만, 친구들의 재치있는 이야기와 실수하는 모습을 보며
폭소를 터트리기도 하고 서로의 진행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즐거워했다.

계란말이를 할 줄 안다는 아이는 후라이팬과 뒤집기를 갑자기 꺼내들더니
요리하는 흉내를 내고, (후라이팬 위의 계란말이는 노란 색종이로 만든 소품이었다^^)
야구선수가 꿈이라는 아이는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시범을 보였고,
줄넘기를 잘한다는 아이는 고난이도의 줄넘기를 선보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렇게 한 아이의 발표가 끝날 때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이름이 적힌 상장을 수여했는데
<1/2 성인증서>라고 적힌 상장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있었다.

"당신은 이 10년간, 주변 분들의 도움을 받아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 성장을 증명합니다.
 이제부터는 10년 후의 자신을 향해 한발 한발 당당하게 나아가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렇게 30명이 좀 넘는 아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이 상장을 받았고 수업은 끝이 났다.
공부를 잘 하거나 못 하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못 하거나, 얼굴이 이쁘거나 안 이쁘거나에
상관없이 이 아이들 모두가 건강하게 지난 10년을 열심히 살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축하받으며 진짜 어른이 되기까지 앞으로의 10년을 향해
자신있게 한발씩 내디뎌도 되지 않을까.
아이들이 이만큼 자라기까지 곁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온 우리 부모들도
그동안 애썼다며 스스로를, 서로를 격려해주어도 되지 않을까.

분명, 세상은 이것보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더 많이 공부하라고. 더 많은 재능을 갖추라고. 더 예뻐지라고. 더 강하고 멋있어야 한다고.
부모들을 향해서도 아이를 건강하게 키운 것만으로 세상은 만족하지 않는다.
더 많이 투자하라.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많은 것을 가르쳐라. 더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어라 한다.
그런데, 만 10살 아이들의 1/2 성인식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

아이들도 부모들도 이젠 좀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않나?
아이들은 그냥 자기가 자라고 싶은대로,
부모들은 그냥 내가 키우고 싶은대로 그렇게 좀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이들이 좀 더 다양한  꿈과 정체성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학교와 학원 외에 또 다른 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을까?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 잘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에서 이젠 벗어나고파 - 라 외친다면
나는 못났거나 부도덕한 부모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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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만 10살을 지나 만 11살을 몇 달 앞두고 있는 아이.

이 아이와 함께 한 지난 10년이 특별했던 이유는,

우리가 서로에게 세상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겪고 느끼고 배우며 우리만의 이야기를 10년동안 만들어왔다.

 

1/2 성인식에 참여한 다른 엄마들 모두도 자신의 아이들과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왔을 것이다. 10년간의 각자의 긴 이야기들을 다 알 순 없지만, 교실 앞에 나와

모두를 향해 의젖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만큼 키우기까지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엄마, 지난 10년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딸아이가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엄마인 나를 향해 읽은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이만큼 크느라 수고했다,

이만큼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비교와 경쟁에 지친 아이들과 엄마들에게

이 소박한 한 마디가 주는 여운이 오래 갔던 하루.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수업참관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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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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