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 연재중인 <김보경의 좌충우돌 에디팅>을 즐겨 읽는다.
출판계와 편집일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데, 얼마전에 실린 글의 제목은
"한 발만 더 다가가보라" 였다.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유명한 이에게 원고청탁을 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헉! 하는 초보 에디터, 그에겐 명품 브랜드같은 존재로 느껴지는 작가에게
직접 연락을 해야 하는 과정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는데,
성공할 확률이 제로에 가깝게 느껴지는 상대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다가가기를 시도하기도 전에 실패할 다양한 경우를 예상하며 미리 포기해버리기도 하고.

살다보면 이런 순간에 참 많이 놓이곤 하는데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면서도 자주 그런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동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학원 ... 아이들과 연관된 많은 시설이나
오프라인/온라인의 다양한 육아 커뮤니티에서 내 관심을 끄는 엄마와 아이들을 만날 때,
'한발 더 다가가볼까..' '아냐, 그냥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지 뭐..'
이 두 마음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기 마련이다.
초보엄마 시절엔 호기심과 체력이 왕성할 때라, 문어발처럼 여러 모임을 기웃거렸었다.
그럭저럭 도움되는 정보도 얻고 즐겁기도 했지만, 늘 부족한 2%가 아쉬웠고
아이들이 좀 크고 나서도 그 부족한 부분에 대한 갈증은 이상하게도 줄어들지 않았다.

사실, 아이들이 어릴수록 동네 아이들과 엄마 모임이 가장 도움되기도 하고 참 좋다.
친근하고 일상적인 동네 친구들과의 관계가 편하긴 하지만, 뭐랄까.. 가치관의 차이랄까.
육아와 교육에 대해 비슷한 가치관을 나누기에 그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편하고 따뜻하니 '더 욕심내지 말자'하면서도 모임이 끝난 뒤,
집에 돌아오면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도 동네 엄마들과는 그냥 푸근하고 편하다.

문제는 유치원이나 학교와 연관된 모임인데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그런 모임을 갖고 돌아오는 날은 허전함을 넘어 피로까지 몰려오곤 한다.
그들과 눈에 보이지않는 신경전이라도 겪고 돌아온 날이면,
이유없이 아이들에게 화를 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지는 것이다.
학부모회의 신구 임원 인수인계가 잦은 요즘, 차가운 표정으로 마주한 엄마들과
의견을 맞추느라 몇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긴장이 풀리면서 머리가 아파온다.
내가 외국인 엄마라서 더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다른 일본인 엄마들도 그런 자리에서
긴장하고 어려워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내 성격이나 능력이 어떠한가와 상관없이 아이들에게 해가 가지않도록
엄마 역할을 잘 해야한다는 부담과 함께, 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의 엄마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조화를 맞춰가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

큰아이가 초등 고학년인 만큼, 그런 일들이 이젠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다.
소치 올림픽에 임하는 김연아의 인터뷰에
"이런 관중 저런 관중 다 겪어봤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맘 속으로 나도 모르게 "이런 엄마 저런 엄마 다 겪어봤다."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상대와 상황에 맞게 적당히 대처할 줄 아는 여유가 생겼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자리에 다녀오고 나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엌으로 뛰쳐가 밥, 김치,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버무려 한 그릇 비벼먹는다.
그래야만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은데, 노련한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네가지가 없는 엄마들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모양이다.

매운 비빔밥을 한 그릇(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한 솥이 되는 경우도;;;) 먹고나면
얼른 컴 전원을 누르고 열어보는게 베이비트리다.

둘째 출산을 계기로 자주 들어와 보게 된  베이비트리와의 만남.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처지다 보니, 모국어로 쓰인 육아기를 읽는게 내겐 일상적인 힐링을

선물했고, 우습기도 하고 눈물 찔끔나는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날 있었던 속상함이나

스트레스를 잊게 해 주었다.

공감가는 이야기와 도움되는 기사가 많았음에도 제법 오랫동안, 나는 은둔형 독자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지난 1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베이비트리에 아날로그 육아기를 쓰며 함께 했다.


그렇게 '한 발 더' 다가가고 나니, 그냥 구경만 할 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상처받고 싶지 않을 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상처와 오해를 받거나 쓸데없는 감정들에 휩싸여 시간낭비할 필요도 없고,

나에게 필요한 정보들만 얻으면 된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런데,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육아 세계의 엄마들을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나와 뜻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어렵게 알게 된 부모들이 모이는 커뮤니티가 좀 더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램,

온라인의 한계가 있겠지만, 좀 더 서로 눈치보지 않고 즐겁게 소통했으면,

그리고 무엇보다 좀 더 따뜻했으면 싶었다.


우리 엄마들은 아이들의 일상과 교육과 연관된 많은 관계 속에서 이미 충분히 피곤하고 고달프다.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잠시라도 마음을 무장해제하고 들어서도 되는 커뮤니티가 있으면 좋겠다.

마침 베이비트리 신년회 소식을 들었고 그래서 천가방을 보내게 되었다.

보내기 전에도 부끄러웠는데, 이미 보내고 난 지금도 여전히 쑥스럽다.

그런데 더 쑥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신년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먼 우리집까지 선물을 보내주셨지 뭔가! 깜짝 놀랐다.

내가 괜한 일을 벌여서 참석하신 분들께 부담을 드린 건 아닌가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다.


DSCN2685.JPG

그런데 빈진향 님 편으로 보내주신 이 많은 곶감들을 열어보고, 말린 과일들을
너무 좋아하는 우리 식구들이 한꺼번에 몇 개씩 먹어치우는 걸 보며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은 어느새 고마움과 뿌듯함?같은 걸로 변해 있었다.
"엘리사벳 님의 <호주여행기>를 비롯한 2차 선물을 또, 곧 받으실 거예요!"라는
진향님의 메일을 다시 받고나서는, 우체부 아저씨가 벨을 누를 때마다 설레이기까지 하니,
아! 이 아줌마의 주책스러운 뻔뻔함을 어찌 하면 좋을꼬!

한 발만 더 들어가면 되는데,
그 한 발이 머쓱해서 못 다가서는 순간, 그 장면을 놓치게 된다.

<한 발만 더 다가가보라> 마지막 부분에 있는 글이었다.
역시 상처받거나 오해받을까봐 마음에만 담아두지 않고, 시작하길 잘 했다 싶다.
벌써 며칠 전에 선물을 받았는데, 고마운 마음 보내주신 분들에게 인사가 늦어져서 죄송하다.
핑계를 대자면, 이번주에 네가지가 없는 엄마들을 많이 상대하느라 좀 바빴답니다.^^
시댁 어른들께서 곶감을 굉장히 좋아하시는데, 이참에 생색낼 껀수가 생겼네요.
이쁘고 고운 한국 엄마들의 마음, 시어른들께 자랑하려구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곶감이, 악화된 한일관계를 겨울눈 녹듯이 조금은 녹여주길 기대하면서ㅎㅎ

그나저나 신년회를 계기로 국제우편을 보내고 하느라,
몇 분과 이메일로 글을 주고받으면서 개인적으로 재밌게 느꼈던 점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도 펴내고, 삶과 육아에 대해 리얼하게 글을 쓰시는 분들이
하나같이 "제가 내성적이어서..." "저는 소심해서..." 라고 말하시는 게 아닌가.
더 우스운 건, 나는 속으로 '아닌 것 같은데..'하면서도 
'혹시 그 말이 진짜라면, 우리 중에서 제가 젤 내성적이고 소심할 거예요.'라고 생각했다는 사실^^

문득, 박완서 님의 산문 중에 한 대목이 떠올랐다.

소심한 자가 모험을 하려면 단짝이 필요한 법이다.

우리, 소심한 엄마들끼리 단짝이 되어 알콩달콩 재밌게 지내보자구요*^^*
마음에 드는 육아 커뮤니티를 건강하게 살찌우려면, 나부터 참여하는 게 중요합니다.
망설이지 말고, 한 발만 더 다가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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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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