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여유가 생긴 날.
거실 소파에 앉아있자니, 아이들과 보낸 지난 시간들의 흔적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어설퍼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10세 미만 즈음일 때 그린 그림들과
저런 때가 언제였나 싶은 아기 때 사진들,
그리고 6월이 생일인 딸아이 덕분에 좋아져서, 해마다 조금씩 걸어뒀던 말린 수국들 ...

저게 다 내가 한 일들이었나.
저 스토리 속에 정말 내가 있었던 걸까.

분명히 여긴 우리집이고, 우리 가족들이 걸어온 시간들이 담긴 장면들인데
갑자기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요즘 꽂혀서 시간날 때마다 보고있는 유튜브 채널에서
어느날, 그 답을 발견했는데 그건 바로

'엄마'에서 다시 '나'로 돌아오는 시간

이란 말이었다.

아이가 10대 중반까지 자라고 나니, 알 거 같았다.
초등학교만 가도 좀 나을까..
중학교 가면 좀 편해지겠지..
입시만 끝나면 좀 괜찮을까..

그런 건 다, 나만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1년만 더 고생하면..
앞으로 3년? 5년만 더 하면 ..
그렇게 버텨왔는데 '좀 편안하고 좀 괜찮아진' 시간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물론 거의 24시간 내내 힘들던 시절에서는 많이 벗어났다.
하지만, 힘들고 곤란한 일들은, 그때그때마다 테마를 바꿔가며 꼬리를 물듯
내 인생에 등장했다.
둘째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고 겨우, 하루 중에 쉴 시간이 생겼나 싶더니
내가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그게 좀 나아질까 싶더니 친정아버지께서 많이 아프셨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년을 꼬박 아버지가 계신 병원을 다녔다.
그러다 결국, 가족 모두 처음 겪는 슬픔을 겪은 게 작년 2월의 일이었고,
그 즈음, 정신이 없는 와중에 미리 면접을 봤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혼을 계기로 외국으로 와 살며 아이들을 낳고, 이런저런 사회활동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은 작년이 처음이었다.
별 문제만 없었다면, 나에게는 꽤 잘맞는 일들이어서 열심히 했다.
근데 결국, 1년 남짓 다녔던 그 직장을 올 5월에 그만두고 말았다.

실제로 경험한
엄마에서 다시 나로 돌아오는 시간.
은, 유튜브에서 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멋있지 않았다.
한두번의 시도로 깔끔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고
'엄마'와 '나'는 어쩜 평생 분리하기 힘든 단어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1년하고 2개월 정도, 직장을 다니는 중 직장일도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그동안 멀쩡하던 아이들이 왜 기다렸던 것처럼 그리도 자주 열이 나고 아픈지..
직장으로 아이들 학교에서 전화가 걸려올 때는 정말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내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가족들이 조금씩 각자 홀로서기를
연습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일, 변화한 일도 물론 많았다.
하지만, 이만큼 애썼으니 이쯤에선 괜찮겠지, 했던 일들이 참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가장 힘든 건, 무언가 예측해서 준비하는 게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마, 큰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옛날옛적 신생아적 시절처럼
한날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게 된 탓이 큰 것 같다.

지금 내가 이 얘길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한시름 놓은 요즘이라 이렇게 글로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사춘기 때 힘들어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 마음이 이런거구나, 하는 걸 이번에 알았다.
힘들면서 마음이 성장하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았다.
아이가 크느라고 힘들어하는 걸 생생하게 지켜보는 게 너무 마음 아팠다.

오늘은 어떻게 될까, 내일은 또 어찌 될까..
조마조마하게 지내는 그 시간동안도, 나의 유일한 위로는
새로운 '내 일'을 찾고 준비하고 도전하는 일이었다.
너무너무 일이 하고 싶었다.
내 일이 하고 싶었다.
일하는 어른들의 대화가 그리웠고,
그 속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 중이다.
사춘기 아이의 학교 담임선생님의 걱정이 담긴 전화를 받는 중에도,
기관지염에 걸려 학교를 징검다리 건너듯 결석하는 둘째의 체온을 재면서도,
미래에 내가 할 일을 상상하고 준비하고 계획하고 정보를 찾는 시간이 행복하다.
그게 현실이 되는 날, 또 걸림돌이 되는 일들은 여전히
내 인생 곳곳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해서든 포기하지 않고 가 보고 싶다.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40대 후반에서 50대 여성들이 일하는 이야기를 많이 찾아 듣고 있다.
그 선배들이 하는 얘기 중에, "마흔은 아직 애기잖아." 라는 말이 정말 위로가 된다.
현실이 만만치는 않지만
주변에 잘 찾아보면,
마흔 즈음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서 작은 성공을 이뤄내는 여성들이 의외로 많다.
50대에 활발하게 일하는 여성들도 많고, 생의 황금기를 보내는 분들도 많았다.

엄마에서 다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
얼마가 걸린다해도
조금씩 찾아가고 싶다.
결혼 전에도, 긴 육아기간 중에도 몰랐던, 더 다양하고 많은 나를 찾고 싶다.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찾는 시간동안
아이들과는 따로 또 같이,
엄마도 새로운 꿈과 목표를 갖고 도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몇 년 안 남은 40대 동안 그렇게 준비해서, 50대엔 내 일을 할 수 있기를.
그게 지금 나의 꿈이다.
부디 이룰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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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현재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어린이식당 운동’활동가로 일하며, 계간 <창비어린이>에 일본통신원으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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