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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준영이는 온종일 ‘열무’를 안고 다녔다.
열무는 내 팔의 2/3 길이쯤 되는 플라스틱 인형으로, 아랫니가 두 개 난 아기 인형이다. 어린이집에서 매달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보내는 교재와 교구는 대개 얼마 뒤면 버려지고 마는데 열무만큼은 네 달 넘게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

 

“우리 막내 어디 있지?”

아이에게 열무는 살아 있는 존재다.

아이는 어린이집에도, 집 앞으로 산책을 갈 때도 열무를 데리고 갔다. 밥을 먹을 때는 식탁 위에 눕히고, 영화를 볼 때도 한 팔로 꼭 안았다. 담요로 둘둘 말아 업고 다니다 토닥토닥 재우고, 밥도 해 먹였다. 잘 때도 머리맡에 두었다.

 
뭐든 언니가 갖고 노는 게 탐이 나는 둘째와 자주 쟁탈전을 벌이지만,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열무만은 안 된다.

이름도 준영이가 지었는데, 작년 아이네 반 담임선생님 뱃속에서 자라던 아이 태명이 열무(열 달 동안 무럭무럭 자라라)였다.

내 엄마도 나에게 저토록 다정했을까. 아니,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를 지켜보곤 했다.

 

아이는 이토록 끔찍하건만 엄마에겐 좀 골칫덩이였다.
세상에서 분홍색이 제일 예쁜 아이는 열무가 처음 우리집에 오던 날 입고 있던 파란색 바디수트를 홀랑 벗겨버렸다. 솜뭉치 맨몸뚱이는 아이가 아끼는 만큼 여기저기 툭툭 터지고 보푸라기가 일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자신 없고 안 하고 싶은 살림살이가 ‘바느질’인 걸 알 리가 없는 아이는 열무의 터진 다리통을 흔들어 보이며 신경쓰이게 했다.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온 나라가 십자수에 빠져있던 시절 네 아빠에게 코가 여럿 빠진 푸우 쿠션을 안겨준 뒤로 바느질을 접었단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에게 실을 꿴 바늘을 선심 쓰듯 쥐어주고 “할머니는 진짜 최고라니까” 하는 사람이지.

하물며 첫 딸인 네가 처음 입은 배냇저고리마저 친구를 시켜 만들었고.
결국 열무의 터진 몸뚱이는 아이의 대모이자 나의 후배가 해결해주었다.

 

열무와 나는 애초부터 궁합이 안 맞았다.
파란색 옷을 벗기면서 아이는 파란색 모자도 던져버렸다. 이빨 두 개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민둥머리 플라스틱 인형은 그 자체로 좀 오싹해서 오래 보고 있기가 어렵다.
제일 싫은 건 둥그렇고 단단한 머리(로 얻어맞을 때).

열무의 한쪽 팔을 잡고 아이가 제 몸을 휙휙 돌릴 때면 힘없이 따라 흔들리던 열무 머리가 내 뒤통수와 광대뼈를 둔탁하게 치고 달아난다. 턱! 특히 거의 잠들 무렵 봉변을 당하면 정말이지 베란다 바깥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는다.

 
아, 내가 이렇게 무자비한 사람이란 말인가.

상황이 어느 정도 종료되고 나면 그런 상상을 한 것이 부끄럽고 슬퍼진다. 나의 잔인한 눈빛을 아이에게 들켰을까 두려움에 시달린다.

이게 다 열무란 놈 때문이다.

 

그런 열무가 세상에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태어난 지 백일 된 ‘진짜’ 아이 손님이 보드라운 펭귄인형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언니의 열무를 그렇게 탐내던 둘째 아이도 나몰라 한다.
바닥에 얼굴을 쳐 박고 있어도 여전히 웃고 있을 속없는 놈. 비록 내가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 꼴이 된 열무가 딱했다.

 

얼마 뒤,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필요한 게 있어.”
“뭐가 필요한데?”
“동생을 갖고 싶어.”
“준영이는 동생이 있잖아.”
“아니, 태희보다 더 조그만 동생!”
“막내도 있잖아. 우리 열무는 어쩌고.”
“아니, 진짜 동생 말이야! 재이 같이.”

 

'재이'는 준영이가 열무를 버리게 했던 내 동기의 딸이다.
이렇게나 자랐구나. 이런 말을 할 만큼, 이런 생각을 할 만큼. 나는 감탄하며 조그맣고 따뜻한 아이를 꼭 껴안았다.

 

세 아이 엄마라...
공부하는 남편, 비정규직 노동자, 겨우 붙들고 있는 독립출판사.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것들을 생각하자 갑자기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싶어졌다.

 

'언제는 사정이 좋아서 애를 낳고 키우더냐?'

'세간의 평판 따위 상관없이 살겠다더니 어떻게 된거야?' 

'둘도 버겁다고 난리면서 한명 더?'
그런데도 가슴만은 콩닥콩닥 뛰며 나를 부추겼다.

 

“일단 하느님께 기도해보자. 우리에게 또 다른 천사를 보내줄 수 있는지.”
나는 겨우 말을 끄집어냈다. 비겁하게도 신에게 떠넘기고 말았지만.
열무란 놈, 넌 정말 골칫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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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숙
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이메일 : elisabethahn@naver.com      
블로그 : http://blog.naver.com/elisabet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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