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책 속 주인공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모모’였다.
모모에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건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남의 말을 듣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 ‘모모’ 中에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진정으로 다른 이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 그러다 문득 모모는 정말 행복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행복했을까?

 

언제부터인지 모를 만큼 오래 전부터 난 사람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닐 때 술자리에서도, 식사자리에서도 난 대개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들어주는 선배, 그게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선배의 모습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주고 진심으로 마음을 써주는 선배. 그런 선배가 괜찮은 선배잖아? 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후배들의 평가는 나쁜 평가보다는 좋은 평가가 더 많았다.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KBS 인간극장에 출연을 하고 난 뒤엔 말을 더 아꼈다. 하지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늘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본 사람이 인사를 하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TV 속에 나온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안녕하세요~”
사는 곳이 인구 7만의 작은 도시다보니 사는 동네가 TV에 나오자 이웃들이 많이 시청을 했다. 특히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이 많았다. 때로는 짧게나마 자신들의 속사정을 털어놓는 이들도 있었다. 상대의 말은 길었고 내 말은 짧았다.
속에 있는 말을 하려 가다가도 멈칫했다.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건 자상한 아빠의 모습이 아니지. TV 속 나는 따뜻한 아빠였고 한편으로는 아내를 몹시 그리워하는 남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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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출연 이후 심리 상담 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상담에서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경청’이었다. 경청엔 공감의 의미까지 포함됐다. 처음엔 경청을 하라고 했는데, 난 상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상대는 그런 나에게 말했다.
부담스러워요.
참 어려웠다. 상대의 말을 진정으로 들어준다는 게 말이다. 한동안 나 자신도 모르게 경청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상담 수련을 받는 날이면 내 가슴표엔 ‘모모’란 별명을 의도적으로 붙였다. 모모와 같은 심리상담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집에서도 ‘모모’와 같은 아빠가 되자, 고도 결심했다. 쓰면서도 그런 생각이든다. 참 다짐과 결심을 많이 하는 구나, 란 생각. 여하튼 그랬다.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잘 들어주는 아빠. 벌써?, 아니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아이는 남자 아이지만 말이 많았다. 생각의 속도보다 말의 속도가 더 빠를 거라는 상상을 할 만큼 말이 많았다. 일어나면서부터 ‘아빠’를 부르기 시작한 아이는 잠들기 전까지 ‘아빠’를 불러댔다. 아빠, 아빠, 아빠.
어제는 아이가 그랬다.
“아빠, 난 오늘 피아노 선생님한테 인사도 안 하고 나왔다?!”
그게 자랑인가? 이유가 궁금했다.
“왜?”
“난 은밀하게 등장했다가, 은밀하게 퇴장한다.”
그러면서 깔깔대며 웃었다. 아이에겐 참 웃기는 일도 많다.
TV 출연 때문인가? 자기가 무슨 영화 속 주인공인 줄 아나? 은밀하게 등장했다가 은밀하게 퇴장한다니…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모모 아빠는 아이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어주려고 노력 했다. 결국 왜 피아노 학원을 은밀하게 들어가 은밀하게 퇴장을 해야 하는지 그 발상을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는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쏟아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이야기부터 친구와 다툰 이야기까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다. 그럴 때면 아이가 말을 잘 붙여주는 꽤 괜찮은 아빠라고 스스로를 생각을 했다. 회사를 다닐 때 꽤 괜찮은 선배라고 스스로 생각을 했던 것처럼.

 

팟캐스트에 초대를 받아 국회의원 두 명을 만나는 날이었다. 바로 그날 책 속 주인공 ‘모모’생각이 났다. 대기실에서 만난 국회의원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햄버거도 아닌 주먹만한 크기의 밥버거를 입에 넣었다. 그렇게 먹는 모습에서 그들은 의원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 보였다. 같이 배가 고픈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눈을 마주치며 말을 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은 팟캐스트를 녹화하는 장소에선 더 이상 ‘의원’이 아니었다. 유사이래 대통령이 피의자로 입건이 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 두 사람은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할 때만큼은 사회적 신분을 떠나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표현했다. 발에 땀이 차면 구두를 벗어 의자에 발을 얹어 놓았고 함께 사는 아내 이야기와 자녀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무척 편했다. 의원이 아닌 사람으로 만난다는 게 말이다. 상대가 의원처럼 말하고 행동했다면 나 또한 한 명의 유권자로서 말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신분을 떠나 한 사람으로 보이자 나도 그렇게 그저 한 사람이 됐다.

 

모모 아빠로 산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인간극장에 출연해 사람들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무척이나 답답해 했던 것처럼, 아이를 대할 때에도 나는 ‘모모 아빠’여야만 하니까 말이다. 모모가 나중에 성장을 한다면 카페나 주점에서 마음껏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들어주어야 하는 모모가 아니라 그냥 속에 있는 이야기와 감정을 털어놓는 모모 말이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겨울방학 내내 답답한 이유를 찾았다. 방학 동안 아이가 곁에 있어서 답답한 게 아니라 모모 아빠로서 말을 하고 행동 때문에 답답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가끔 답답함이 짜증이나 큰소리로 나오기도 했다. 오히려 좋은 아빠가 되자는 다짐이 오히려 결과가 더 안 좋은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회사 다닐 때 난 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선배’로서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또 ‘선배’로서 말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내 '후배'들은 많았지만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일상'과 '삶'은 잘 몰랐다. 기자 선배로서 말을 하는 순간 우리 화두는 회사와 사회, 기사 이야기로만 채워졌다.  
인간극장에 출연을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PD가 편집한 나의 이미지로서 상대의 말을 듣고 반응했다. 그건 아빠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로서 행동하고 말한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아빠로서 말은 많이 배운 자의 말이고 가르치는 자의 말이고 억지로 따뜻해야 하는 말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도 아빠의 아이로서만 말을 해야만 한다.

항상 그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자주 그 무엇도 아닌 ‘나’로서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의 나가 아니라 그냥 나로서 상대에게 다가가면 상대도 한 인생으로서 만날 것만 같았다. 나의 아들도 나의 아이이기 전에 ‘강.민.호.’라는 한 사람으로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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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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