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260757.JPG » 30개월 다돼서야 말문이 트인 아이. 요새는 '강남 스타일'에 빠졌다.

 

"엄마 누부루(루브르) 박물관전 가요"

이렇게 수준있는 대화를 하는 아이는 누구인가? 바로바로바로 불과 서너달전까지만 해도 엄마 까까 쭈쭈만 연발하던 우리 아이다.

물론 "루브르 박물관전 가서 뭐 볼건데?"라고 되물으면 "번개맨! 이케이케이케"하면서 번개맨 포즈를 취한다. 티브이에서 전시회 광고를 보면서 아빠가 몇번 같이 보러갈까 말했더니 익힌 말이다. "침대에 진드기 있어. 요에서 자요" 이런 말도 한다. 이 역시 방향제 광고에서 배운 듯 하다.

 

아무튼 약 석달전부터 아이에게도 그분이 오셨다. 방언 터지듯 말문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 엄마들이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더 귀여워진다더니 정말이지 그 조그만 입에서 엉뚱한 단어나 문맥의 단어들이 나오는 걸 보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예를 들어 요새 아이가 자주 하는 말 중에 "나는 깜짝 놀랐잖아"가 있다.  "엄마 안경 어딨지? 아 여기 있구나"이래도 "나는 깜짝 놀랐잖아" 하고 "어 넝쿨당 시작하는 시간 지났네? "그래도 "나는 깜짝 놀랐잖아" 라고 반응하는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아이가 스폰지처럼 이해력이 늘어나고 언어를 흡수하면서 애로사항도 새록새록 생겨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반차를 내고 아이랑 아이를 봐주는 이모와 함께  병원에 갔는데 그 전날 회식을 해서 속이 안좋았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나는 귓속말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아무 생각없이 "엄마 응가마려"라고 속삭였다. 그러고는 좀 있다가 갑자기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달려갔는데 아이가 엄마를 찾았나보다. 이모가 "엄마 화장실에 쉬하러 갔어"그랬더니 아이가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엄마 쉬야 아냐, 응가야"이래서 엄청나게 창피했다고 한다.

 

나의 나쁜 언어습관도 아이를 통해 유전되고 있다. 남편한테 농담으로 "바보" "멍청이"이런 말을 썼나보다. 아니 가끔 쓴다. 인정. 언니(이모)가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는데 큰 형아들에게 "멍청아""멍청아"이러면서 쫓아다녔다는 것이다. 언니가 "아휴, 착한 애들이라 봐줬지, 아니었으면 한대 맞았을 거다"하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최근에는 돈이야기를 많이 한다. "돈 많이 벌어서 스티커 사구 어쩌구저쩌구""엄마 이거 얼마예요?" "너무 비싸다"를 입에 달고 산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마다 매달리는 아이에게 "엄마가 회사 가서 돈 많이 벌어야 인이 까까 사줄 수 있어"그랬더니 '돈많이 벌어' 타령을 하는 것 같다. 비싸다는 말은 나도 모르게 애 앞에서 너무 많이 했나보다. 얼마 전에는 무슨 테마파크 기념품점에 갔다가 아이가 고른 장난감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점원한테 이 조그만 아이가 "너무 비싸다"는 말을 해서 어찌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그건 2800원이었는데 말이다.

 

돈이야기의 결정판은 이모랑 문화센터를 다녀오던 길에 아이가 돈많이 벌어서 번개맨책을 사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외쳤다는 절규다. "나는 돈이 덩말(정말) 좋아~~~" 사십 평생 꺼내본 적 없는 이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란 말인가. 잠꼬대라도 하는 걸 애가 들었나? 얘야 엄마는 살아가는 데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통속적 인간이긴 하지만 정말 좋다고 외칠 정도로까지 사랑하지는 않는단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라는 말이 새삼 절감된다. 아이가 종알종알 말하는게 예쁜 줄만 알았지, 내가 무심코 던지는 말들을 이렇게 충실하게 재현할 줄은 미쳐 생각지 못했던 거다.

 

그래도 이 와중에 한가지 위안으로 삼고 싶은 건 아이가 '멍청이'같은 비속어(?)는 쓸 지언정  '싫어''안돼''미워' 따위의 부정적인 말은 쓰지 않는다는 거다. 말이 느는 만큼 떼도 늘기는 한다.'아냐'라는 말은 아이가 자주 쓰는 단어중 하나다. 하지만 어휘가 쑥쑥 늘어나는 것과는 달리 부정적인 단어는 아직 '아냐' 하나에만 머물고 있다. 이게 모두 내가 싫어나 안돼, 나빠 따위의 부정적 언어를 적게 쓰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아주, 매우, 무척이나 긍정적인 해석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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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 기자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은 팔랑귀를 가지고 있는 주말섹션 팀장. 아이 키우는 데도 이말 저말에 혹해 ‘줏대 없는 극성엄마가 되지 않을까’, 우리 나이로 서른아홉이라는 ‘꽉 찬’ 나이에 아이를 낳아 나중에 학부모 회의라도 가서 할머니가 오셨냐는 소리라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엄마이다. 그래서 아이의 자존심 유지를 위해(!) 아이에게 들어갈 교육비를 땡겨(?) 미리미리 피부 관리를 받는 게 낫지 않을까 목하 고민 중.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여주고 입혀주기 위해 정작 우는 아이는 내버려 두고 인터넷질 하는 늙다리 초보엄마다.
이메일 :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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