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본격적으로 다엘이 사춘기의 실전에 들어갔다.
다엘과 내가 부딪치는 시점을 분석하니
주로 하교시간에 집중돼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다엘의 양말은 마치 신발처럼 새카맣고
옷에는 다양한 흙먼지가 내려앉아 있다.
간식부터 찾으려는 다엘과
옷 갈아입고 손발부터 씻으라고 하는 나의 신경전이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참았던 나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갈등에 종지부를 찍을 신묘한 한 방을 준비했다.
바로 약속 공책.
하교 후 할 일, 휴대폰과 TV 보는 시간, 수학공부,
집안일 하기에 관한 구체적 사항을 정리했다.
그 중 첫 번째.
‘하교 후 옷 갈아입기, 손발 씻기, 가방 속 물건 내놓기를
잘 한 날은 엄마가 책을 읽어준다.’
덧붙여 다엘이 20분 놀아주기도 추가해달라고 하여 수락했다.

 

부정적 행동에 대한 페널티가 아니라
긍정 행동에 대한 보상이 훨씬 효과적이란 사실을
시간이 가면서 더 실감한다.
도서관에서 해리포터를 빌려와 잠자기 전 읽어주는데
내가 더 흥미를 느끼게 됐다.
곁가지 이야기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많으냐고 함께 불평하면서도
열심히 읽어서 이제 두 번째 권으로 접어들었다.

 

해리포터.jpg » 다엘과 쓴 약속공책과 잠자기 전 읽는 해리 포터.

 

다엘이 초등 고학년이 되고 나서 책 읽어주기를 중단했지만
청소년기 자녀에게도 책 읽어주기가 좋은 교육 수단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읽어준다는 행위는 책 내용에 못지않은 의미를 갖는다.
성장기 아이를 그냥 등 떠미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와 함께 하는 활동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엘은 타고난 예민함 탓에 평소 쉽게 잠 들지 못했고
어둠과 잠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느끼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를 읽다가 잠이 드니
양질의 수면에도 도움되어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다엘이 요구한 놀이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작은 물건을 내가 숨기면 다엘이 찾아내는 것인데
놀라운 것은 아이가 이를 너무나 좋아하고 행복해했다는 점이다.
숨긴 물건을 찾아 다니면서
다엘은 힌트를 달라는 둥 어디 숨겼냐는 둥 물어보며
숨 넘어갈 정도로 웃어댔다.
유아들에게나 걸맞는 단순한 놀이에 푹 빠진 다엘을 보면서
나는 많은 반성을 했다.

 

그간 참 많이 외로웠구나….
성장기는 단숨에 엄마 품을 벗어나는 게 아닌데
함께 하는 놀이 시간을 모두 중단하고 엄마가 다른 일에만 신경을 썼구나.
갑작스레 어린 시절을 빼앗긴 아이는
숨기고 찾는 놀이에 몰두하면서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하는 것 같았다.
며칠간 쉴새 없이 이어지던 놀이 요구는
결핍이 채워졌는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춘기는, 유년기라는 문이 닫히며 바로
환골탈태하는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이유기를 통해 저만큼 나아갔다 돌아오고
또 좀더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점차 간격이 커지며 마침내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이리라.
이 시기, 부모의 따뜻한 동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한발 늦게 깨달았다.

 

작년쯤인가 다엘은 산타 할아버지가 없는 거냐고 물었다.
학교 친구들에게서 들었다며 내게 사실확인을 하길래 답해주었다.
“산타를 믿지 않는 애들에게는 산타가 없는 거야.
너도 산타를 안 믿어?”
그러자 큰일 날세라 얼른 다엘이 대답했다.
“아니야, 난 믿어!”

 

이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다엘은 잔뜩 들떠서
자신이 꼭 받고 싶은 선물에 대해 얘기했다.
들어보니 연로하신 산타가 준비하기에 버거울 듯 하여
좀더 욕심을 낮추어 1, 2지망을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드디어 성탄 전야.
다엘은 전과 다름없이 과자를 준비하고 정성껏 편지를 써서 거실에 놓았다.
설레는 마음을 누르고 잠자리에 누웠던 다엘이 갑자기 말했다.
“아, 어떡하지? 베란다 가운데 있는 자전거를 구석으로 치워야 하는데 깜빡했어!
산타 할아버지가 들어오실 때 너무 비좁을 텐데 지금 치우고 올게.”
내가 잡아 끌며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는 좁은 굴뚝으로도 잘 들어오시잖아.
아무 걱정하지 말고 빨리 자!”

 

성탄절.jpg » 산타와 루돌프를 위해 다엘이 준비한 과자와 편지

 

다음날 아침, 선물을 손에 들고 기쁨에 찬 다엘의 모습을 보며
내게도 따뜻한 행복이 전해졌다.
유년기의 끝에 있는 아이를 보는 엄마의 마음,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조금씩 품에서 떠나가는 다엘을 향해
애틋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어떤 변화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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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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