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민_회전.jpg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집은 왠일로 정리가 슬슬 되어가는 듯 했고. 초등학교 1학년 2주차에 접어든 아들 수민이는 뒹굴거리며 공룡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지. 가정통신문은 모두 봤고, 이제 알림장만 보면 오늘의 미션은 완료! 그날 알림장에는 과제가하나 들어있었다.  


'나의 장래 희망은 (       ) 입니다' 


괄호를 채우는 것이다. 훗 이 정도야. 남편에게 가볍게 토스했다. 수민이의 장래희망. 얼마전 유치원 졸업식에서 소방관이었으니, 아직도 그것이겠거니 하고 나는 식탁에 지지않은 김치 얼룩을 지우고 있었다. 


남편이 아이에게 질문했고, 얼핏 '보통사람' 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응? 보통사람? 저 보통사람, 믿어주세요. 그 보통사람? 쌍팔년도 기호 1번의 그 보통사람? 아니겠지. 설마....


"여보, 수민이가 장래 희망이 보통 사람이래요" 


남편이 슬그머니 옆으로 오며 말했다. 


그랬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서 처음 말한 꿈은 보통사람이었다. 응? 


나는 설마하며, 물었다. 정말? 그랬더니 남편이 답했다. "응. 회사다니는 보통사람이래." 

거창한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마음 속 바람이 피시식 하고 빠지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의 눈빛에도 얼핏 당혹이 비쳤다.  


아이의 의사는 존중해야지. 난 나름 배운 사람이라구. 허허허. 속으로 나를 달래면서 돌아섰다. 그러나 나의 비루한 지식인 코스프레는 5초를 견디지 못했다. 나는 곧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수민이의 주변을 맴돌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보통사람이 꿈이야 수민이는?"

"응"

"수민아. 보통사람은 직업이 아니야."

그러자 약 3초 뒤에 다시 아들은  말했다.

" 뭐 돈은 좀 벌어야겠지"

뭔가 심드렁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심드렁의 꼬랑지라도 잡고 싶었다.

"그렇지 돈을 벌어야지. 그럴려면 직업이 있어야해. 그걸 묻는 거야."

"뭐 회사다니면서 돈 벌지 뭐"


나는 생일날 원치 않는 선물을 받아든 사람처럼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결국 또 묻고 말았다.

"회사다니는 보통사람이 꿈이야 수민이는?"

"응"

"근데 얼마전에는 꿈이 소방관이었잖아"

유치원 졸업식 때 남을 돕는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적어냈던 아들이었다.

"꿈은 변하는 거야"

공룡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화를 이어가던 아들은 이렇게 결론을 냈다. 그러고는 나를 힐끗 바라보고 말했다.

"엄마는 그것도 몰라?"

일희일비 하지말자. 아이를 초등학교에 들여보내며, 내가 스스로와 약속한 마음의 규칙이었다. 좀더 대범해 지고자 했다. 


그러나 역시 상위 1%에 달하는 나약한 정신력으로 나는 2주만에 그 규칙을 깨뜨렸다. 


보통사람이라는 아들의 꿈을 듣는 순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 속에는 또 오만가지 생각이 덕지덕지 붙기시작했다. 


'일비'가 시작되었다. 

머릿속으로는 최근 읽었던  '원하는 게 없는 요즘 아이들'이라는 칼럼. 10년 20년 뒤 취업난에 맥없어 하는 아들의 모습까지 섞어가며, 혼자서 호들갑을 떨었다.  


이후에도 나의 질문과 회유는 계속 되었지만, 수민이의 반응은 영 미적찌근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보통사람이 꿈으로 적힌 알림장을 책가방에 넣었다. 잘가. 내 아들의 초등학교 첫번째 멋진 꿈. 대통령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기대했던 첫번째 멋진 꿈아. 안녕.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내 아들의 첫번째 (보통) 꿈으로 인정하마. 보통사람.  


(물론 그렇게 보내면서도 선생님은 수민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엄마인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소심한 고민은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수민이의 알림장의 앞 페이지를 다시보다. 문득 문제의 '나의 꿈'이 적힌 페이지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꿈이 바뀌어져 있다. 우주비행사. 


아니. 이럴수가. 수민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또 며칠전 그날처럼 책에서 눈을 안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뭘하면 좋겠나 생각해봤더니. 우주비행사가 하고 싶더라고 그래서 고쳤어" 


선생님이 고쳐준 것 아니냐. 니 스스로의 생각이냐. 못미더워 몇 번을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나의 질문공세에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내가 혼자서 그거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거라니까"


며칠 전 머릿 속으로 호들갑을 떨던 내가 머쓱해 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물처럼 흘러가는 데 나만 갇혀서 뱅글뱅글 소용돌이를 만들고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나의 아들은 고작 8살. 꿈이, 직업이, 돈이 아직 낯선 나이다. 


그 8살 아이의 몇 마디 말에 동동 거리는 나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나는 문득 내 마음 속 욕심을 들킨 것 같았다.


자꾸자꾸 깨어지는 다짐이지만, 그래도 나같은 의지박약 상위 1%는 계속 갈고 닦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육아수련' 아니던가. 그래서 학부모 3주차에 접어든 나는 다시 수련의 한 길로 나간다.  


일희일비 하지 않겠다. 

나의 아이를 믿겠다. 


그리고 또하나. 


나의 꿈을 강요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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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
31살에 처음 엄마 세계 입문. 지금까지도 끝이없는 힘이 딸리는 육아의 신비에 당황하며 살고있다. 인성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으나 마음속 지킬엄마와 하이드엄마 사이에서 매일매일 방황한다.현재는 스스로를 육아무림에서 수련을 쌓고 있는 수련생으로 설정, 특유의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언젠가는 고수에 등극할 날이 있으리라 낙관하고 있다. 2011년에서 2014년 여름까지 중국에서 아이를 키웠으며, 현재는 한국 서울에서 '자칭' 날쌘돌이 9살 아들, 제1 반항기에 접어든 6살 딸과 기상천외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메일 : rimbaud9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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