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선거 투표일이었던 6월 4일.
남편이 서울 출장 간 사이,
친정 부모님과 아이와 함께 시골 할머니 댁에 다녀왔어요.
전북 진안군 깊숙한 산중에 자리 잡은 산골 마을.
우리가 머물고 있는 화순 북면보다 훨씬 더 촘촘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한 여름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답니다.
오늘 점심 상에 오를 부추를 손질하는 엄마.
마당에서 금방 뽑아올린 싱싱한 것들로 상을 차리는 일은
언제라도 뿌듯해요.
그동안 딸기 사냥에 나선 할머니와 아이.
할머니가 흙을 탈탈 털어 손에 쥐어주면,
아이는 후딱 제 입으로 쏙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입을 열심히 오물오물 냠냠, 아 맛있어!
애교 윙크가 저절로 나옵니다요^^
옥수수, 양파, 마늘, 상추가 풍성한 앞마당은 든든한 남자 어른 같고,
꽃과 장독대를 품은 옆마당은 아담하고 소박한 여인 같아요.
넌 언제 어디서 날아왔니.
주인도 모르는 사이 마당 한편에 자라난 양귀비.
사실 이것 말고도 네 다섯 그루가 더 있었다는데,
양귀비 키우는 일이 불법이라는 걸 알고 난 뒤, 곧바로 없애버리셨답니다.
아마 할머니가 유난히 꽃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저것마저 남겨두시지 않았겠지요.
민초들은 이렇게 사소한 것이라도 정해진 것을 지키고 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부뚜막에 펼쳐져 있는 고들빼기 씨.
고들빼기라면 환장을 하는,
이제 내 몫의 텃밭까지 가진 큰손녀를 떠올리며
올해 할머닌 전보다 더 많은 씨를 받아놓으셨을 거에요.
부뚜막 옆 커다란 키에는 검정색 파(조선파) 씨가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고들빼기 김치며 파 김치, 하여튼 저의 김치 사랑은 유난한데,
이미 다른 작물들로 가득차서 심을 땅이 없다는 데도
한사코 신문지에 한 주먹 담아 주십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유품이나 다름 없는 장작들.
원래 제 고향,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가 나고 자란 고향은
여기서 차로 한시간 쯤 떨어진 곳이었어요.
평생 이사할 일이라곤 없을 줄 알았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모네가 살고 있는 이 마을로 오게 된 것은 16여 년 전,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졸지에 수몰민, 실향민이 된 때문이었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처마 밑에 가득가득 쟁여 두었던 장작들도 함께 옮겨왔는데,
이제 저만큼 밖에 안 남았네요.
낯선 동네에서 할아버지는 유난히 외로워했고, 이사하고 5년 만에 돌아가셨어요.
경제성장, 개발이란 명분으로 국가는 언제까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할 것인가.
만약 댐이 건설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의 터전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오랜 친구들과 친인척들과 계속 그곳에 머물렀더라면,
할아버지는 좀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명절마다, 철마다 찾아갈 고향이 있는 우리 후손들의 삶도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아름답지 않았을까.
할아버지가 힘없이 걸터 앉아 계시던 콘크리트 뜰팡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깁니다.
자자, 할머니 집 공식 포토존, 장독대로 모이세요~
여든 세 살 차이가 나는 할머니와 딸, 사랑스러운가요?^^
뱃속의 태희까지 다섯 명의 여인들
뭐니뭐니 해도 젤로 신나는 점심 시간!
손으로 짝짝 찢은 신김치와
인삼과 통마늘, 대추를 둠뿍 넣고 푹 삶은 삼계탕 대령이요~
삼계탕에 야채죽까지 배불리 먹었건만
할머닌 과일과 과자를 끊임없이 내옵니다.
다른 수는 없어요. 아이고 배불러, 하면서 먹고 또 먹을 수밖에^^
할머니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책과 돋보기.
"아이고, 차가 모래밭에 빠져셔 난리가 나고..."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할미한테 약 사보내고, 뭐 사보내고, 시상에..."
여든 중반 노인의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합니다.
저는 돋보기를 쥐고 한글자 한글자 더듬으며,
기쁜 맘으로 때론 짠한 맘으로 손녀딸의 책을 읽어갔을 할머니 생각에
시상에... 눈물을 펑펑 쏟을 뻔했어요.
할머니 집을 나서는 길,
벽에 걸려 있던 짚으로 만든 '똬리'가 저를 부릅니다.
얼마나 오래됐을까.
누가 만들었길래 지금도 저리 단단해 보일까.
나도 이젠 어엿한 시골 마을 주민이건만,
왜 여전히 할머니 집에 올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지는 걸까.
단순히 우리집에는 키나 장작, (이름도 가물가물한) 똬리가 없기 때문만은 아닐 거에요.
산으로 둘러싸인, 사람이 얼마 없는 시골에 사는 건 똑같아도
할머니 집에는 긴 세월이, 시간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겠지요.
문득 우리는 어떤 역사를,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검고, 붉고, 노란빛을 골고루 내며 타들어 가는 장작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댐이 들어서면서 물속에 잠겨 버린 나와 내 아버지의 고향. 그리고 처마 밑에 사시사철 수북하게 장작을 쌓아 올렸던 할아버지.
농한기 때나 어쩌다 일이 없는 날에도 가만히 집에 있는 법이 없던 농사꾼은 연탄보일러가 들어온 다음에도 장작 패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6·25 때 총을 맞아 한쪽 다리를 절었는데, 땅바닥에 질질 끌릴 만큼 커다랗고 기다란 나무를 지게에 지고 삽짝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지게가 기우뚱하고 넘어져 그를 덮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
기가 막힌 건 할아버지의 장작 패는 솜씨였다. 일단 톱으로 쓱쓱 썰어 여러 개로 토막을 친 뒤 토막 난 통나무를 세워놓고 도끼로 세 번 내리치면, 똑같은 두께의 장작 네 토막이 만들어졌다. 그러면 나는 그것들을 신 나게 처마 밑으로 날랐다.(중략)
철이 들고 난 뒤엔 무작정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거칠고, 투박한 사투리를 쓰는 시골 사람들이 싫었고, 세련된 옷을 입고 도시에서 살고 싶었다. 더 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 집과 멀리 떨어진 대학에 입학한 것도,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하면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그토록 버리고 싶어 했던 촌스럽고, 오래되고, 시골스러운 것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학 때 한 달에 한 번, 집에 내려가는 기차 안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처럼. 떠난 뒤에야 비로소 그곳이, 그때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 결론은 해피엔딩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