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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리 어제 바퀴달린 오리배 봤지, 땅에서는 버스가 되고 물에서는 배가 되는.
우리가 어제 갔던 데가 바로 여기야.
여기 지도에 인어사자(merlion) 그림이 있잖아. 우리가 여기서 오리 배를 본 거라구. 저기 사과 건물도 있고...
아, 맞다. 여기가 바로 레이저쇼 하던 데야.
관람차에 불 들어오는 것도 봤는데. 관람차는 이렇게 돌아가더라. 엄마, 잘 봐, 이렇게,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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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거 내 가방이다.”
우리가 짐을 싸는 동안 해람이가 옆에서 그동안 모은 관광 안내 브로셔를 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비닐봉지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서울에 해람이 배낭도 따로 있긴 한데 해람이가 가방을 스스로 못 챙길 것 같아서, 결국 내 짐이 되겠다는 생각에 가져오지 않았다.
그동안 해람이 물건은 아루 가방에 넣어서 아루가 들고 다녔는데 해람이가 다짜고짜 가방 독립 선언을 한 것이다.

 

“우와, 해람이 가방 멋진데!!”
“포쓰있어!!!”
좌린과 내가 멋있다고 한마디씩 했더니
“흥, 나는 등에 메는 배낭도 있고 이렇게 옆으로 메는 작은 주머니 가방도 있어.”
해람이의 비닐 가방(?)에 쏟아지는 찬사에 샘이 난 아루가 말했다.
“누나, 내 가방도 등에 멜 수 있어. 이거 봐! 그리고 이렇게 손목에 차도 되고, 두 손으로 들어도 되고. 내 가방도 좋지??!!!"
해람이가 제 가방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 비닐봉지 손잡이에 팔을 하나씩 껴서 등에 메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났다.

 

해람이도 가방이 갖고 싶었구나.

여행에서 짐을 싸고 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일주일에 한 번 숙소를 옮길 때마다 치르는 이 중요한 일에서 해람이를 쏙 빼놓은 것이 조금 미안했다.

 

“비닐 봉지 좋은데! 현지인 스타일이잖아.”
가방을 사줄까, 하는 내 말에 좌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현지인 스타일!
브라질을 여행할 때였다. 브라질은 치안이 나쁘다고,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실제로 우리가 리오 데자네이루에 머무는 기간에도 버스 강도 사건이 있었다. 무장 강도가 버스 기사를 위협하여 버스를 외딴곳으로 끌고 가서 강도 행각을 벌인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다.
여행 안내책에도 무장 강도와 도둑에 대한 장황한 경고와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이 길게 적혀 있었다.
타겟이 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현지인처럼 입고 행동해라, 현지에서 옷을 사 입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귀중품은 되도록 가지고 다니지 말고, 카메라는 비닐봉지에 넣어 다녀라.

이러한 충고 때문인지 리오의 관광 명소에서 만나는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어설픈 옷차림에 비닐봉지나 추레한 가방을 들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어도 여행자들은 표가 나는 법, 길을 걸으면서 좌린과 '여행자 찾기' 놀이를 하곤 했다.
한 번은 지하철역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맞은편에 앉은 한 남자를 보았다. 저 사람이 여행자일까, 현지인일까, 내기를 걸었는데 그 남자가 비닐봉지에서 뭔가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좌린과 내 눈을 동그랗게 만든 그것은... 마미야 중형 카메라였다!

 

해람아, 맞다. 소중한 것일수록 티 안 나게 비닐봉지에 넣어 다니는 게 좋다.
수륙양용 오리배 브로셔
언더워터월드 수족관 브로셔
시티투어 이층 버스 브로셔
맥퀸 그림 카드
빨강, 파랑, 초록, 흰색 버튼들...(아루와 경쟁적으로 수집한 펫트병 뚜껑들)
해람이 가방 속의 귀중품들.

 

 

 

다시 말레이시아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내일 드디어! 우리가 몹시 고대하던 보르네오 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그리고 싱가포르의 물가, 깔끔하지만 고시원 느낌이 나던 게스트하우스로부터 벗어나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지난밤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공항까지 가는 에어아시아 무료 셔틀을 알아내어 나는 몹시 우쭐해졌다.
싱가포르 이민국의 바리깡으로 각 잡은 단정한 남자를 지나쳐 자면서 뒷머리 눌린 더벅머리 말레이시아 남자를 보니 배시시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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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오늘 우리가 잘 숙소는 공항 근처의 리조트, 무려 별 네 개짜리 리조트라는 사실! 원래 계획은 조호바루에 새로 생긴 레고랜드를 가려고 했는데 테마파크는 그만 가자고들 해서 대신 리조트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공항 바로 옆에 있는 리조트가 특별 할인을 하시길래 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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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서 오래 놀고 싶어서 입실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갔는데

이런, 오늘이 수영장 청소를 하는 날이란다. ‘수영장 정기 점검 및 청소 일입니다. 투숙객의 수영장 사용을 제한하여 죄송합니다.’라는 문구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이럴 수가! 우리가 이 리조트에 온 이유는 첫째도 수영장, 둘째도 수영장, 오로지 수영장 때문이었는데.
실망스러웠지만, 아이들이 더 실망할까 봐 그런 마음을 감추고 방에서 조금 쉬었다가 다른 재미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일 일찍 일어나서 비행기 타기 전까지 실컷 놀자, 수영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오늘은 구경만 해볼까? 자연스레 발걸음이 수영장으로 향했다.
청소하는 직원에게 괜히 말 붙여 귀찮게 이것저것 묻고 근처에서 계속 얼쩡거렸더니, 수영장을 보며 군침 흘리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수영장이 한 군데 더 있고 거기는 오전에 청소를 다 했다고 알려주었다.

야호! 방으로 달려가 물놀이 준비를 해서 다른 수영장을 찾아갔다. 리조트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넓은 골프장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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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가는 길에 만난 이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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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구부려 빨대 되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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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수영장은 국제 규격의 50미터 레인 수영장. 투숙객이 별로 없는지, 청소하는 날이라고 모두 체념한 건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와~ 우리 가족 전용 수영장이네! 모두가 입이 하마처럼 벌어져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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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기능이 있는 아루의 똑딱이 카메라로 물속에서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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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는 해람이가 동동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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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게 좋다. 그래서 나는 수영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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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때까지 신 나게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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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오전에도. 드넓은, 어제 청소를 해서 깨끗한 수영장을 우리가 독차지했다. 날씨도 끝내주게 파랗다.
리조트에서 우리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미리 알아서 청소도 싹 해 놓고.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 못 오게 한 건 아닐까?
야자나무에 둘러싸인 멋진 수영장에 누워 하늘을 보며 계속 실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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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 인도를 여행할 때부터 호시탐탐 노렸던 룽기(치마처럼 입는 천)에 드디어 익숙해진 좌린, 원피스보다 아빠의 너덜거리는 티셔츠를 더 좋아하는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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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안다. 이것이 호화 리조트에 어울리는 리조트룩(look)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러나 우리는 전용 수영장을 가진 사람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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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도 좋고 바삭바삭한 침대 시트의 느낌도 좋고.
깔끔하고 쾌적한 욕실에서 밀린 빨래를 해 널었다.

 

 

 

엄마, 이게 뭐야?
칫솔, 치약이잖아.
그럼, 이건?
구두약! 어머, 여기는 구두약도 있네.
아이들이 화장실에 비치된 일회용품들, 종이 상자로 포장된 것을 하나씩 열어 보며 신기해했다. 마치 선물 상자 열듯이.
일회용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호텔에 비치된 세면도구를 뜯어 쓰지 않는다. 다만, 조그만 샴푸와 물비누를 보면 귀엽고 예쁘다는 생각에 자꾸 챙기게 된다.
아이들은 플라스틱 커피 숟가락을 하나씩 챙겼다. 병원놀이 도구라고, 청진기로 썼다가, 내시경으로 썼다가 구강 검진 막대로 썼다가...

 

 

전용 수영장까지 마련해준 리조트 측에는 상당히 미안하지만, 여기서 하룻밤 자며 방세 말고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근처에 식당이 없다는 걸 미리 알아서 공항에서 먹을거리를 넉넉히 사서 들어왔다. 리조트 레스토랑에서 근사하게 분위기를 내기에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준비가 안 돼 있다고나 할까.

그래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쓰레기 치우고 잘 정돈해 놓고 방 청소하는 분들을 위한 팁은 잊지 않았다.

 

제가 다녀본 리조트 중에 최고였어요! 고맙습니다!
체크아웃하며 프론트 직원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는 센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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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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