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운송수단 가운데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기차일 것이다... 열차 밖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불변한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생상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
...호텔 방에 누워 있으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 밑에 줄을 그을 수 있다.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밀양행 기차에 올랐다. 밀양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는 희망버스 일정을 따라 사진을 찍으러 가는 중, 혼자 떠나는 2박 3일의 사진 여행이다. 기차 안에서 습관적으로 책을 펼쳤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그의 섬세한 감성이 짧은 여행에 영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가방에 쑤셔 넣었던 것이다.

 

공식적인(?) 나의 일정은 이렇다. 오늘 저녁에는 내 글과 사진을 특집으로 실은 ‘밀양 문학’의 출판 기념회가 있고 내일부터 1박 2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오는 ‘희망 버스’의 일정을 따라 사진을 찍을 것이다.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따지고 보면 내가 꼭 가야 할 이유는 없다. 무리해서 예약했던 기차를 놓치고 아무 열차나 타게 된 내 속마음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일을 할 때 우리는 주위의 낯선 세계로부터 은근한 도움을 받는다. 마음이 어수선한 요즘,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부터 은근한 도움’을 받고 싶었다. 오후 3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에 늘 어딘가로, 보들레르가 말하는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떠나고 싶었다.

 

저자가 그렇듯 기차에 몸을 기대어 앉았고 내 생각은 차창으로 흘러가는 낯선 풍경을 따라간다. 지난밤에 만났던 선배들과의 술자리, 오전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 아침에 아이들이 밥을 잘 먹지 않는 것에 대한 걱정, 그리고 도착지 밀양에서 지난여름에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풍경 속에 두서없이 생각들이 흘러간다. 좁은 통로로 간식거리를 실은 카트가 지나간다. 어릴 때 기차에서 삶은 달걀을 먹고 체한 기억이 선명한 나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옆에 그가 앉았으면 달랐겠지. 뭘 먹을까, 기차를 처음 타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앞쪽에서부터 카트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두툼한 소시지를 고르며 기뻐했을 그를 떠올린다.

 

생각이 멈춘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어서 떠오르는 엊저녁 선배의 말, “걔는 4차원이잖아. 화성인도 아니야, 안드로메다 어디 아닐까? 그러니까 그 말에 너무 집착하지 마.” 그래, 안드로메다의 언어까지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잖아, 선배의 말을 되새기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단단한 응어리,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자꾸 치밀어 오른다. 바라본다, 충격, 분노, 원망, 체념, 지난 보름간 겪은 내 감정의 소용돌이. 창밖의 풍경처럼 흘러가도록 놔둔다. 조금은 차분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답답한 마음을 정리해보려고 글을 썼다. 거봐, 누구나 이런 말을 들으면 상처 입는 거야! 왜 내가 아파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생각을 깨고 싶었다. 그러니까 네 잘못이야, 나를 위로해줘. 예상대로 내 감정을 지지하는 댓글들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더욱 자기 연민에 쩔었고 그는 구석에 몰렸다. 내 글을 그렇게 여러 사람이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논평들,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주인공이 돼 버린 듯한 기분이 불편했다. 내가 옳아, 내 감정이 맞아! 애초의 생각대로라면 승리감에 취할 수도 있었는데 남편을 공격(?)하는 댓글이 보기 싫었다. 그에 대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그가, 그리고 우리가 훌륭하게,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쁘지 않게 일구어온 세월이 부정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 산 지 13년, “글쎄 ‘그 인간’이 어젯밤에...”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친구가 남편을 칭하는 말에 한편으로 깜짝 놀라고 한편으로 그렇게 ‘웬수’ 같지 않은 우리 사이를 다행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 아내 흉을 보는 남자들을 보며 ‘왜 저러고 살까’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들 그러면서도 ‘사랑’이라는 말 속에 사는데, 심지어 바람을 피우고 집에 들어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야.’라고 한다는데. 밥상 앞에서 히히덕거리던 그날 아침, 아니 그가 그런 말을 했던 바로 직전의 순간까지, 우리는 꽤 잘 지내지 않았던가.

 

우리에게 ‘사랑’은 뭐였을까? 그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 질문은 나 자신에게 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동안은 그에게 따지고 왜 사랑이 아니냐고 화를 냈는데, 그가 한 말을 외계어쯤으로 애써 무시하려고 했는데. 문득 질문의 대상이 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이 어둑해진다. 창에 비치는 나를 본다. 내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과연 그를 사랑했을까?

 

그와 결혼할 때 조건을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돈이나 실리를 추구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 그것을 믿고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있어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당위가 된 것 같다. 꼭 지켜져야 하는 것, 그래서 결혼했으니까. 내 감정이 충족되지 못할 때, 내가 원하는 모습이 돼 있지 않을 때, 내가 믿고 따라온 그 사랑이 아닐까 봐, 두려웠다. 확인하고 싶었고 기대에 어긋나면 슬퍼하고 외면했다. 훨씬 더 좋을 수 있던 일들이 ‘사랑’에 대한 나의 기대 때문에 망쳐지곤 했다. 늘 이유는 있었다, 내가 '더' 아프고 힘드니까. ‘나보다 힘든 상대방을 먼저 헤아리겠습니다.’라고 한 약속을 어긴 것은 내가 아니었나.

 

그땐 어쩔 수 없었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던 지난 일들, 난처해하던 그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아프다, 한 장면, 한 장면 떠올리는 것이. 분노와 원망에 휩싸였던 때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나를 마주하는 것이. 하지만, 비로소 혼란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그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여행하기를 좋아하고 버킷리스트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끊임없이 가야 할 곳을 정해주고 해주기를 바라고 요구하지 않았나. 그래야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하지 않는다, 노력했지만 할 수 없었다는 그의 말은 외계어가 아니라 오랫동안 고민했던 솔직한 고백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이 진정한 사랑이었을까? 정말 내가 꿈꾸던 것인가, 내가 믿었던 그 사랑에 들어맞는지, 의심하고 따져보느라 그의 마음과 행동을 순수히 받아주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 있게 사랑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나의 버킷리스트를 그에게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던 것이,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보아주기를 바라면서 그의 마음, 그의 상처를 살뜰히 보살펴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이번 일을 겪으며 우리는 서로가 정말 다르다는 것, 그리고 습관이나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가 나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이 나는 낯설었고 무심코 한 내 행동에서 그는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단다. 여행 다닐 때, ‘어디를 가면 좋을까?’하고 물으면 그의 대답은 거의 ‘아무 데나 좋아요.’였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내게 미루는 그가 마뜩지 않았고 그는 ‘아무 데나’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단다.

어설픈 이해와 존중의 몸짓보다 그 이전에 자신을 더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차이를 아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해를 요구하기보다 나와 다른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는 말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솔직해지고 싶다고 했다.
나는 몹시 혼란스러운 감정에 허우적거렸지만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됐다.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와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서 그 믿음을 발견했을 때 나를 돌아볼 용기가 생겼다.

지난 글에서 나는 그가 했던 ‘말’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썼다. 하지만, 이제 ‘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이 서로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내려놓기로 마음먹는다.
이 정도면 잘하는 거지, 우리는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라는 변명과 오만에 가득 차 있던 나의 사랑을.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목조 오두막을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인간은 호텔을 건축하고, 만을 준설하는 등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이루어내면서도, 기본적인 심리적 매듭 몇 개로 그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울화가 치밀 때면 문명의 이점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지! (같은 책)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랑’을 내려놓는다.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목조 오두막’을 즐기고 싶다. 우리는 말이 잘 통하고, 함께 가꾸는 텃밭과 집이 있고 아이들이 있다. ‘지켜져야 할’ 무엇에 매달리지 않고 함께 나누는 일상 속에서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느낌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기차가 상동역을 지난다. 곧 밀양이다. 나는 사진을 찍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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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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