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unsplash)
니키 로버츠의 《역사 속의 매춘부들》을 읽고는 누군가에게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은 여성의 ‘성’을 파헤치는 책이다. 나는 중·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을 통해 여자가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으면 몸을 ‘버리게 된다’고 교육받았던 세대에 속한다. 그런 교육을 받은 뒤로, 실수로 몸을 버려서 인생을 망치게 될까 봐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괜히 헤프게 이 남자, 저 남자 만났다가 ‘걸레’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늘 언행을 돌아보며 조심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꼬리치는 것’으로 보일까 봐, 혹은 내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거짓 소문을 퍼뜨려 ‘걸레’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역사 속의 매춘부들》을 읽으면서, 그런 강박관념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여자를 성녀 아니면 창부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모두 남자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사고 때문에 여성들이 평생 정신 분열적인 상태에서 살게 된다는 사실도.
600쪽이 넘어가는 이 두툼한 책은 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 중 여성들이 대부분 ‘창녀’라고 불리는지 사료를 통해 차분하게 짚으며 분석한다. 트로이의 예언자였던 카산드라나 탁월한 정치력으로 유명했던 그리스의 아스파시아, 예수의 일대기에서 중요한 장면마다 출현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왜 언급될 때마다 이름 앞에 ‘창녀’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가? 역사 속의 남자 인물들은 왜 ‘창남’이라 불리지 않는가? 백 명이 넘는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카사노바는 왜 바람둥이나 호색한 정도로 불리는가?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동안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던 역사 서술 방식에 커다란 의문을 품게 된다. 몇천 년 동안 통용되어온 관념들을 제시한 뒤 하나하나 뒤집어 보여주는 서술 방식 덕분에 쉽게 몰입해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 책을 읽은 뒤 ‘창녀’라는 개념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때까지는 누군가가 ‘창녀’라는 말로 불리면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행여나 내게 그 이미지가 옮겨올까 봐 두려워 그 사람을 의식에서 밀어내고 단죄하려 들었는데, 그런 태도가 사라진 것이다. 아울러 혹여나 내가 ‘걸레’, ‘창녀’로 불리게 될까 봐 불안해하던 마음이 상당 부분 가라앉았다. 어떤 현상의 심장부로 들어가 그 메커니즘을 알게 되는 것, 즉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실생활에 커다란 힘을 미칠 수 있음을 최초로 알게 해준 독서 경험이었다.
이런 독서 경험은 활활 타오르는 분노로 이어졌다. 예전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어갔거나 ‘나는 절대 저런 평을 듣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며 얼른 피해갔을 일들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여성 비하적인 말들을 그냥 들어 넘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남자들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면 ‘능력 있다’고 평가되고 여자들이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면 ‘헤프다’고 평가되는 것에 분노했다. 그런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부러 ‘헤프다’거나 ‘걸레’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개념으로 보면 ‘미러링’을 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여기저기서 ‘싸움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너무 부정적이다’, ‘여자가 너무 드세다’, ‘사회 부적응자다’, ‘그러니까 남자 친구가 안 생기지’와 같은 말을 밥 먹듯 들었다. 그러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런 말을 내뱉은 상대와 논쟁을 벌였고, 맹렬하게 싸우며 끝까지 저항했다. 하지만 거세게 저항하는 겉모습과 달리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래, 내가 너무 드세서 남자 친구가 없나 봐’와 같은 생각을 하며 괴로워했다. 사회 전체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만만하게 던지는 상대의 말은 은연중에 마음 깊이 스며들어 논쟁이 끝난 뒤에도 내 안에서 두고두고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온몸으로 끙끙 앓았던, 참으로 아프고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