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이와 주원이.jpg

 

5월 3일... 좀 특별한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다.

내 남자친구다.

그는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대학과 직장에 다니던 시절에

오래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로 오래 지냈다면 쉽게 연인 사이를 떠올리겠지만

우린 좀 달랐다.

초등학교 졸업이후 소식을 모르고 살다가 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동창회를 통해 연락이 닿게 된 그와 내가 가까와진 것은 그도 나처럼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과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사람과 같은

학교에 다닌 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시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내 첫사랑은 늘 우울하고 힘들었는데 그 친구를 만나러 그의 학교에

자주 가곤 했던 나는 늘 첫사랑의 흔적을 찾아 교정을 돌아다니곤 했던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는 여자 친구를

그 친구는 늘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해 주었다.

 

우린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둘 다 집안이 어려웠다.

그 무렵 그 친구는 갑작스런 부친의 상을 당해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있었고, 나는 아빠의 실직으로 어려워진 집안 형편으로 인해

용돈은 커녕 학비를 벌어야 하는 압박으로 숨 막혀하는 입장이었다.

 젊음을 마음껏 누리기엔 서로가 지고 있던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으면서도

 우린 문학과 예술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외로웠다.

 

우린 말이 잘 통했다.

둘 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부모과 형제에 대한 연민이 컸고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품으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커다란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자주 만났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지난 시절에 겪은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내 첫사랑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들어준 친구도 그였을 것이다.

 

어느 일요일에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일을 하러 나간 빈 집으로 나를 불렀다.

젊은 두 남녀가 일요일 오후 비어 있는 집안의 안방에서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이유는....

뮤지컬 '캣츠'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교육방송에서 보여준 뮤지컬 '켓츠'의 오리지널 공연을 녹화했었고

그 공연을 보며 느꼈던 감동을 내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녹화 화면은 조악했지만 '캣츠' 공연의 출연진의 뛰어난 연기와 아름다운 음악은

우리 두 사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우린 감탄하며 감동하며 '캣츠'를 보았다.

자기가 느끼는 것을 같이 느껴줄 것이라 믿었던 사이.. 그 시절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날엔 나를 만나주지 않는 첫사랑이 야속해서 덜컥 신문에 실려 있는

'오대산 등산' 산악회 모임을 두 자리 신청해 버렸는데 느닷없이 전날 전화를 걸어

크리스마스날에 산에 가자는 내 청을 그 친구는 받아 주었다.

그 친구 역시 성탄절날 특별한 계획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건네본 말이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겨울산에 가자는 말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제대로된 등산 장비도 없이 우리 두 사람은 전문 산악인들 틈에 끼어 눈 덮인 오대산 정상을

올랐다. 지금도 낡은 앨범 어딘가에 그날 오대산 정상에서 얼어붙은 카매라를 품에 녹여 가며

찍은 사진 한장이 있을 것이다. 그 친구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그 친구라면 들어줄 거라고

믿었던... 그 시절 내게 그는 그런 친구였다.

 

아마도 우리가 그런 사이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도 큰 이유가 되었겠지만

내 사람됨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아껴 주었던 그 친구의 깊은 마음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언젠가 돈을 벌면 꼭 브로드웨이에 가서 진짜 '캣츠'공연을 보겠노라던 그 친구는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미국 출장길에 브로드웨이까지 날아가 바라던 오리지널 공연을

보고 왔다고 내게 전해 주기도 했다.

소개팅을 했는데 좋은 여자를 만났다고, 열심이 연애를 하고 있다고 이따금 그는 소식을 전해왔다.

내가 먼저 결혼을 했고, 그도 이어 소개팅으로 만났던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친구보다 여덟살 어린 그의 아내는 명랑하고 밝은 이쁜 사람이었다.

내가 먼저 아들을 낳았고, 그도 이어 아들을 낳았다. 서로 첫 아이의 돌잔치를 챙겨 주었다.

처음으로 내 집을 가졌을때  동창중에 유일하게 초대한 것도 그 친구 부부였다.

두번째로 얻은 그의 딸은 내 막내딸과 동갑이었다.

내 책이 처음 나왔을때 그에게도 잊지 않고 보내 주었고, 그는 내 책을 잘 읽었노라며 전화를 해 주었다.

한겨레 베이비트리에서도 글 잘 읽고 있다고 말 해 준 것도 동창중에선 그 친구가 유일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주 연락하거나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낸 것은 아니었다.

결혼해서 가정이 생긴 이후에는 정말이지 특별한 일이 있을때나 전화, 혹은 문자로 소식을 전했을

뿐이지만 몇년만에 전화를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가 잘 살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오랜만에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집에 한 번 놀러오라고

청했는데 마침 5월 3일에 기회가 되어 그 친구 가족이 우리집에 놀러왔다.

아홉살 아들은 윤정이와 잘 통해서 마당에서 벌레들을 관찰하느라 밤 늦도록 깔깔거렸고

다섯살 딸은 이룸이가 아주 좋아해서 오래 오래 어울려 놀았다.

이룸이 얼굴에서 내 모습이 보이듯, 그 친구의 딸 얼굴에선 그 친구의 모습이 흠씬 묻어 있었다.

 

둘 다 힘든 젊은  시절을 보냈고 지고 있던 삶의 무게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잘 이겨 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따듯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 고맙고 뿌듯했다.

정작 제 마누라는 뮤지컬이나 오페라에 관심이 없어서 말이 잘 안통한다고 그 친구는 툴툴 거렸고

내 남편도 문학이나 예술엔 별 관심이 없지만 함께 사는 것엔 지장없다며 우린 웃었다.

실제로 그 친구를 만난 것은 8년 만이었지만 살림하며 애 키우는 여자들끼리 말이 잘 통해

수다는 마누라들끼리 주로 나누느라 오랜 친구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룰 틈이 없었다.

그래도 잘 어울려 노는 서로의 아이들을 보며, 이런 분위기를 편하게 즐겨주는 배우자들을 보며

그 친구도 좋았을 것이다.

 

남편은 마누라의 남자친구 가족을 위해 마당에서 맛있는 고기를 구워 주었고

마누라가 손님들과 밤 늦도록 수다를 떠는 동안 식탁을 치워주고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다 해주었다.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밤 늦게까지 어울리던 그 친구의 가족은 한밤중이나 되서야 일어섰다.

그 친구의 두 아이들은 우리집을 너무 좋아해서 자고 갈 기세였다.

다음달에 앵두가 익으면 또 놀러 오라고  했다. 내 청에 친구보다  친구의 아내와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이 다음에 이 다음에 우리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어 그 때 다시 만나면 어떨까...

젊은 날 우린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겐 결혼이나 가정, 부모가 되는 일은

너무 아득해 보였는데 어느새 그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그래도 우린 잘 살아 왔구나..

 

'언니는 오빠랑 그렇게 잘 통하는게 많았는데 왜 오빠랑 결혼 안 하셨어요?'

수다를 떨다가 그의 아내가 내게 물었다.

잘 통하는게 많은 사이의 결론이 모두 결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친구와 내가 통하는 것 만큼

우리가 서로 같을 수 없는 것도 수없이 많다.

 살다보니 결혼이란 모든 것이 잘 통하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서로 달라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관계일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겠다. 남편과 나는 취미도, 성격도 많이 다르지만

우린 잘 살고 있고 그 친구 역시 서로 다른 배우자를 만나 잘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앵두가 익고 감이 익을때 그 친구 가족이 다시 놀러 올지 모른다. 이번에 이렇게 재미나게

어울렸어도 살다보면 또 몇 년씩 못 만나고 지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 친구는 여전히 어디선가 내가 쓴 글을 통해 내 삶을 보고 있을 것이고,  나 역시

그 친구가 여전히 성실한 가장으로 충실한 남편으로 아빠로, 아들로 잘 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잘 살아온 우리에게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잘 살아가야할 우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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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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