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 3.jpg

 

흔히 '낀 세대'의 애환을 말한다.

위에서 찍어 누르고, 아래서는 치받고 올라오고...

그 사이에서 양쪽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들의 고충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형제들 사이에도 이렇게 '끼어있는 아이'가 있다.

우리집처럼 아이가 셋 인 집은 물론 둘째가 그런 아이다.

 

열 한 살 오빠는 드세고 네살 막내는 말이 안 통하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둘째는 일곱살이지만

이런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일찍 말이 트고 눈치가 빠르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살피면서 제 할일도 잘 알아서 하는 영민한 아이로 자랐다.

그렇지만 그만큼 마음 고생이 많고 스트레스가 심하다.

 

애 셋 데리고 살림하다보면 아이들에게 심부름 시킬 일이 많은데

제일 많이 움직이는 것이 둘째다.

큰 아이는 대번에 '싫어요, 엄마가 하세요' 하고

막내는 '엄마, 어떻게 해요?' 하며 잘 못 알아들으니

제일 만만한게 둘째이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둘째는 엄마가 힘들때 무엇을 시키면 안 움직이는 오빠와 동생대신

냉큼 제가 나서서 도와준다.

그게 늘 고맙고 대견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도

마음엔 서운함이 컸었나보다.

 

특히 제 물건을 맘대로 사용하는 막내는 언니가 먼저 잡아도 제가 놀고 싶다고

떼쓰고 울기 선수인데 그럴때마다 집안은 시끄러워지고 큰 아이는 울지말라고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집안이 아수라장이 된다.

남편과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언니 한 다음에 하자고 막내를 달래보지만

막내는 늘 요지부동으로 더 크게 울어 버린다. 결국엔 둘째를 타이르게 된다.

'어쩌니. 동생은 아직 어려서 기다릴 줄을 모르는데.. 계속 놔두면

집안이 더 시끄러워지고... 윤정이가 양보해주고 다른걸 하면 어떨까?'

물론 이렇게 타일러도 윤정이가 싫다고 하며 사실 방법은 없는데

윤정이는 늘 속상한 표정으로 막내에게 물건을 줘버리고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면 집안은 다시 평화가 오고 우린 의젓하고 마음 착한 둘째를 대견해 했는데

이렇게 지내오는 동안 둘째 마음속엔 서운하고 화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느날 둘째는 내가 심부름을 시키자 갑자기

'맨날 나만 시키고, 심부름은 다 내가 하고, 동생한테 양보하라고 하고..

나만 힘들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 달려가보니윤정이는 엉엉 울면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빠는 잘 안시키면서 자기만 시키고, 이룸이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하고, 자기 물건도 가져가서 안 주고, 내가 먼저 놀고 있는 것도 양보해주라고 하고... 그런것들이

너무 너무 힘들고 속상했다고 둘째는 오래 울었다.

 

너무 너무 미안했다. 나 역시 가운데 끼어서 자란 아이였다. 위로 언니 둘,

아래로 여동생 둘, 그래서 늘 위 아래를 신경쓰느라 내 주장을 제대로 못 해보며

컸는데 영리하고 마음 착하다고 여겼던 윤정이도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만 이해해주면, 둘째만 움직여주면, 둘째만 양보해주면 집안이 더 편안해지고

평화로와진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둘째에게 계속 강요했던 것은 아닌지

남편과 나는 오래 반성했다.

 

그래서 우린 이제 윤정이에게 '싫어요'라고 해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오빠가 안하는 심부름을 네가 다 할 필요는 없다고, 너도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 해도

된다고 했다. 마음이 우러나서 돕는 건 좋지만 니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면

안해도 된다고 했다. 동생이 아무리 울고 떼를 써도 주기 싫으면 주지 말라고도 했다.

언니니까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는 건 불공평하고 옳지않으며,

동생도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집안이 더 시끄러워져도, 우는 소리가 늘 넘쳐도 니 책임은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그 다음부터 윤정이는 하기 싫은 심부를은 '싫어요'라고 하고

이룸이가 떼를 써도 모른척 한다.

 

내가 자랄때도 늘 어른들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언니한테 먕보하자, 동생에게 먼저 주자. 너는 착하니까 양보할 수 있지?'

나는 정말 내가 착한 아이인줄 알았다. 그렇게 양보하면서 마음속엔 늘 서운함이

꽉 차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 고여있던 억울함과 서운함은

어른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도 지금껏 나 자신을 위한 돈을

쓰는 일엔 늘 서툴다. 내가 그렇게 자랐으면서도 난 윤정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알아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저 늘 너무 잘 해주니까, 어린 나이에 너무 의젓하게 이해해주고 엄마 사정

알아주는게 기특하고 대견해서 착하고 고마운 아이라고만 여기며 지냈다.

영리해서 엄마의 기대가 뭔지 말로 안 해도 알아채고  그대로 하려고 애써왔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우린 이제 둘째에게 싫은 건 거부하고, 자기 마음이 하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제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오빠가 여동생에게 부탁하는 만큼

여동생도 오빠에게 부탁할 수 있고 오빠도 그 부탁을 들어줘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큰아이에게도 알려 주었다. 막내라고 늘 더 많이 봐주고, 더 많이 배려했는데

이젠 막내도 떼쓰고 고집 부려도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늘 순둥이처럼 나를 제일 많이 도와주던 둘째가 '싫어요' 하며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모습이야말로 그 아이가 제대로 자라는

모습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살아가려면 양보도 필요하고, 이해도 필요하고, 상대방의 상황과 감정을 읽는

자세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하는 말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의 기대에 맞추어 자신을 죽이다보면 나중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 시대의 딸들은

그렇게 커왔다.

 

그저 큰 소리 안 나는게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늘 우는 소리가 들리고

싸우고 소리치고 난리가 나더라도 치열하게 자기를 주장해보고

상대방의 말도 들어봐야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순둥이 딸의 반란으로 집안은 더 시끄러워졌지만 고맙고 대견한

반란을 나도 남편도 진심으로 지지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둘째야, 이젠 남보다 니 마음을 더 많이 돌보는 것을 배우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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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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