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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로 인한 휴교로 일주일의 자유를 누리던 아들은 그 시간의 대부분을

양주에 있는 이모네집에 가서 그야말로 낙원같은 생활을 즐기다 왔다.

매일 고기 반찬에 TV 시청, 게임을 하며 신나게 놀다가 금요일 저녁에 돌아온 아들은

그제서야 휴교시간에 해야할 수학 숙제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나마도 토요일 다 지나고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숙제를 시작한 녀석을 들여다보았더니

방에 비스듬이 누워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쓱쓱 문제를 푸는

정말이지 눈 뜨고 볼 수없는 자세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제대로 하라고 했더니 바로 도끼눈을 뜨며 바라본다.

마지못해 물건들로 잔뜩 어질러진 책상을 대충 밀어내고 앉길래 한숨쉬며 나왔더니

금방 숙제를 다 했다며 채점을 해 달란다.

 

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에서는 국정교과서 대신 교사들이 선정한 수학 문제집을 중심으로

수학을 배우고 있는데 풀이 과정까지 써야 하는 스토리텔링 문제집이다.

아이들마다 수학실력이 다르기 때문에 한 학년이라도 다 다른 단계의 문제집을 푸는데

아들이 푸는 문제집은 일반 초등학교 4학년 용이었다.

평균보다 2년 늦은 진도로 수학을 배우는 것도 살짝 한숨이 나오지만  그게 내 아이의

수준이니 어쩌겠는가.

숙제가 꽤 많은 분량이었는데 고작 한 시간여만에 다 했다고? 제대로 한거 맞아?

하는 마음으로 답안지를 꺼내들고 채점을 하기 시작했는데....

답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아들이 쓴 글씨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나오는 문제들은 답도 긴 문장으로 쓰도록 되어 있는데

아들의 답들은 일단 띄어쓰기가 불분명해서 한 눈에 알아보기 어려울 뿐 더러

글씨도 작고 흐린 연필로 써서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정확하게 알아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아들!! 이거, 뭐라고 쓴 거니?"

"엄마가 읽어보세요"

"엄마는 글씨를 잘 못알아 보겠는데? 좀 더 정확하게 또박또박 써야 하지 않을까?"

" 이게 안 보이세요? 전 잘 알아보겠는데요?"

아... 또... 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한다. .

"답을 쓰려면 채점하는 사람이  알아보기 쉽게 정성들여 써야지. 이렇게 쓰면 알아볼 수 가

없어"

애써 화를 누르고 차근차근 설명을 하는데 아들이 먼저 폭발했다.

"전 정성들여 쓴 거라구요. 남들은 다 알아보는데 엄마만 못 알아보는 거라구요"

아 놔... 이 녀석 정말 머리 뚜껑 열리게 하는구나.

늘 이런 식이다.

답만 맞았나 틀렸나만 확인해 달라는데 무슨 글씨가 부정확하느니, 더 똑바로 쓰라느니

하는 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엄마 보기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면 그건 자기 문제가

아니라 못 알아보는 내 문제라는 거다. 이러니 수학 채점하다 금방 감정 싸움 하게 된다.

아들의 논리에 말려들지 말자고 생각하지만 삐딱하게 엄마를 비난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

내 속의 화산은 바로 폭발하고 만다.

"글씨를 이렇게 작고 희미하게 쓰면 채점하는 사람이 어떻게 알아봐. 누가 보더라도 한 눈에

알아보게 써야지. 그 정도 성의는 들여서 답을 적어야지"

아들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지우개를 찾아 신경질적으로 북북 지우기 시작했다.

한 번 한것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아들이다.

 

그러나 화를 내며 건성으로 지우니 오히려 안 지우니만 못하게 되었다.

"똑바로 잘 지워야지. 그렇게하면 더 지저분해져서 새로 답을 써도 알아보기 더 힘들잖아"

"다시 쓰라면서요. 그래서 지우잖아요. 하라는 대로 해도 왜 화를 내세요?"

아아아... 뒷 목 잡고 쓰러지겠구나. 니가 힘든건 다 너를 힘들게 하는 엄마탓이구나..

니 잘못이 아니고 다 내잘못이구나..

이럴땐 정말 어떻게 하는게 옳은건지 분간이 안된다.

이미 짜증이 날대로 난 아들을 상대로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법까지 설명하다간

채점이고 뭐고 다 집워치워야 할 판이다.

또 한번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지저분한 종이위에 새 답을 적는 것을 지켜보았다.

"됐죠?"

아들은 동그라미 치는 것을 확인한 후 재빨리 제가 보던 책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다음 문제를 보니 나는 또 나지막한 탄식과 더불어 또 다시 아들을 불러야 했다.

풀이과정과 답을 적는 문제에서 아들은 풀이과정도 제 멋대로 순서를 섞어 적은 후에

그나마 맞는 답도 답 칸에 쓰지 않고 풀이과정 옆에 적어 놓은 후 밑줄을 긋고 그 밑줄 아래

화살표를 찌익 그어 답칸에 연결해 놓은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뜻이니?"

"그게 정답이라는 뜻이지요"

"아니, 그럼 답 칸에 정확하게 적어줘야지. 화살표만 답 칸에 꽂아 두면 어떻해"

"이렇게 해 놓으면 이게 답이라고 다 안다구요"

도대체 이 녀석의 이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걸까. 다시 머리뚜껑이 열리는 참이었다.

"답 칸이 있는 것은 답을 이곳에 쓰라는 뜻이야. 풀이과정 옆에 답을 적어도 답 칸에 한 번더

적어줘야지"

"다 풀어서 답 까지 썼잖아요. 이러면 다 알아본다구요. 왜 엄마만 맨날 이상하게 생각하세요?"

아들은 기막히고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다시 하느님이라도 감동할 인내심을 발휘해 열리려는 머리뚜껑을 잡아 눌렀다.

"그리고 이게 무슨 숫자야. "

"5000이요"

아들은 0이라는 숫자를 쓸때 원을 완전히 잇지 않고 중간까지만 그린다. 그러니까 늘 내 눈에는

0이 아니라 C처럼 보인다. 그래서 한참 '용량과 단위'를 배울때에는 아들의 답이 몇 씨시를 표시한건지

아니면 단위가 아니라 숫자를 적어 놓은건지 헷갈렸다.

"0은 그냥 정확한 원으로 그려. 이렇게 적으면 0인지 씨씨인지 헷갈리잖아. 수학은 기호가 아주

정확해야 하는 학문이야. 조금이라도 다르게 표시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고.."

"이게 0이지 어떻게 다른 기호예요. 선생님들은 다 알아본다구요. "

그냥 알겠어요. 다음부터는 정확하게 쓸 께요..... 하면 끝나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내 아들일리 없지.

아들은 아주 엄마가 일부러 트집을 잡는 것 처럼 분개를 하며 펄펄 뛴다

정작 뛸 사람은 난데 말이다.

 

"이건 또 5인지  S인지 알아볼 수 가 없어. 5는 그냥 5로 정확하게 써 줘. 9자도 그렇고 2자도 그렇고..

숫자를 알아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답을 맞추니. 수학은 숫자가 무엇보다 정확해야 하잖아.

똑 바로 정확하게 써 달라고.. 이렇게 알아볼 수 없게 써 놓으면 채점을 할 수 없잖아"

"저도 엄마가 쓴 숫자, 알아보기 어렵거든요?"

아들은 화를 내며 꽥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나는 순간... 너무나 화가 나서.....

웃음이 터졌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열을 내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엄마를 보고 아들은 도대체 저 웃음의 정체가 뭔지 긴장하다가

자기도 따라 웃었다.

"엄마 숫자를 못 알아 보겠다고? 아이고, 세상에.. 나원참.. 하하하"

 

내가 악필인거 안다. 내가 쓴 글씨를 내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게

내 예술가적 특징이라고 우긴다. 그렇게 써도 사회생활에 지장없다고 큰소리친다.

그런데 그 얘기가 아들 수학 채점 할 때 나올줄은 몰랐다.

 

필규 24.jpg

 

"필규야.. 엄마가 글씨 엉망인거 엄마도 아는데 너는 지금 학생이잖아.

평가를 받고 과정을 수행해야 하는 학생이라고..

엄마는 이미 그 과정을 다 끝낸 사람이고..

그러니까 너는  지금부터 앞으로도 한참동안 더 네가 한 일들을 누군가에게

평가받아야해. 엄마의 악필과 비교할게 아니라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기준들에

맞추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수학은 무엇보다 태도에 대한 학문이라고 생각해. 모든 문제를 다 맞추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니가 아는 것들은 누가 봐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성의있게 써야 한다고..

아는데까지 최선을 다해 푸는 태도, 아는 만큼 똑바로 적는 정성, 이런 것이 중요한

학문인데 너는 지금 그 태도가 부족해. 엄마는 그 태도를 말하는 거야"

 

한바탕 웃고 나는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필규는 웃을 듯 말듯 한 표정으로 대꾸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도 초등학교 4학년때 수학을 포기했어. 그때부터 정말 어렵고 자신이 없어서 크게

겁이 났지. 그래도 말이 그렇지, 대학 들어갈때까지 필요한 과정들을 해 내려고 엄청

애썼어. 한번도 수학을 잘 하진 못했고 대부분 점수도 형편없었지만 언제나 노력했다고..

잘 하려고...

공부를, 수학을 잘 하라는 말, 엄마가 하지 않잖아. 어려워서 이해못하고 잘 못하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니가 할 수 있는데까지는 최선을 다 해서 정성을 들여야지. 최소한의 성의를 들여야지

그마저도 애 쓰고 싶지 않아하는... 그런 태도가 늘 엄마는 속상하고 아쉬워.

그 부분이 엄마를 화나게 해."

 

"..... 알았어요. 그러니까 엄마도 다음부터는 제가 좀 더 잘 알아보게 글씨랑 숫자랑 써 주세요."

아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내 어깨를 안았다. 끝까지 엄마한테 밀리지 않는 꿋꿋한 자세다.

아이고..

 

"여보, 도대체 저 녀석이 천재일까, 바보일까. 숫자를 알아보게 쓰라고 했더니

엄마가 쓴 숫자도 못 알아보겠다며 버럭 거리더라고..."

아들과 나의 설전을 방에서 모두 다 들은 남편에게 나중에  이런 푸념을 늘어 놓았다.

"그게 비정상이지 정상이냐?" 남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픽 웃는다.

"그래도 나는 엄마 아빠가 무서워서 그런 생각이 들어도 감히 따지지 못했다고..

쟤는 내가 너무 편한걸까? 아니면 그냥 건방진건가? 아니면 정말 제 생각이 분명한건가?"

"그냥 게으르고 버릇 없는거지, 제 생각은 무슨..."

하면서도 남편 역시 빙글거린다. 남편은 이런 걸로 머리 싸쥐고 고민하는 마누라도 웃기고

엄마도 숫자 똑바로 쓰라고 따지는 아들도 웃긴 모양이다.

 

"그래도 놀랍긴 하더라. 한시간 정도 밖에 안 됬는데 그 많은 문제들을 어째튼 풀긴 다 풀었더라고..

옛날 같으면 너무 많다고, 이걸 어떻게 다 하냐고 난리치고 울고불고 짜증 부리고 했을텐데..

분명 전보다 성장한 부분은 있는데 나는 도저히 아들 공부는 못 가르치겠네, 어쩌냐..."

"놔둬. 아들하고 똑같이 유치하게 싸우지 말고... "

 

모처럼 아들 수학숙제 봐주다가 유체이탈 할 뻔 했다.

이제 몸도 나보다 커 진 아들은 일어서서 정색을 하고 따질때는 나보다 시선도 높아서

여간 약오르는게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은 쑤욱 커지는데 그에 걸맞게 생각도 자라주는건지... 아... 어렵다.

 

더디게 더디게 그래도 배움이 자라고 있는거지? 그런 거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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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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