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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아들과 방학 내내 사이 좋게 지냈다.
하긴 싸울 일이 없었다.
아침엔 느긋하게 늦잠 자고 종일 맘대로 놀다가 자는 날의 연속이었으니 말이다.
학원이고 학교 방과후 프로그램이고 간에 어디 매어 있는 데가 없으니 시간 맞추어 종종거릴 일이
없는게 무엇보다 좋았다.
그런데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방학숙제!!

혁신학교 2학년인 아들의 방학숙제는 일주일에 두 편 이상 일기쓰기와 독후감 2편이 필수과제고
다른 것들은 다 자율과제여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숙제라는건 고작 일기와 독후감 뿐이었던 것이다.
어디가서 말 하기도 부끄러운 이것도 숙제 랍시고 아들과 실랑이를 했으니
참으로 기막힐 뿐이다.

아들은 책 읽는 것은 너무 너무 좋아하지만 글 쓰는 것을 아주 아주 싫어 한다.
일주일에 두 편 일기 쓰는 것도 힘들어 하고 안 하고 싶어 해서 어르고 달래고 야단을 쳐야
간신히 해 내는 형편인데 한 번도 안 해 본 독후감에서 사단이 났다.


'독후감은 어떻게 써요?'
'... 뭐...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 주인공을 친구로 여기고 편지를 쓰는 방법도 있고
그냥 평범하게 니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쓰기도 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쓰냐구요'
아아,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참아야지. 침착하게 차근 차근 가르쳐 줘야지.

'우선 니가 쓰고 싶은 책이 어떤건데?'
'이거요'
아들이 가져온 책은 박시백이 만화로 풀어낸 '조선왕조 실록 성종 편'이었다.
'이거 너무 어렵지 않을까?' 했더니
'난 이게 재미있다구요' 버럭 화부터 낸다. 성질머리하고는...
쓰는 것도 싫어하면서 제게 맞는 책 고르는 안목도 없다. 아이고 답답해라.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 비해서 쓰는 능력은 한참 뒤쳐진다.
어떤 연구로는 6년 정도 늦다고도 하더라.
그러니까 남자아이는 초등학교 내내 쓰는 것이 여자아이보다 한참 늦고 부족하다는 것.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마음을 비우자. 조금씩 실마리를 줘 가면서 이끌어 내는거야.


'이 책은 왜 골랐어?'
'재미있으니까요'
'어떤 점이 재미있는데?'
'만화잖아요. 유머도 많고.'
아아아... 그렇구나.
'그럼 거기서 시작하는거야. 니가 왜 이 책을 골랐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말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처음을 시작하느냐구요!'
아니 다 알려주었는데 아예 글을 불러주련? 속이 터진다.
'만화라서 재미있어서 골랐다면서 그렇게 쓰면 되지'
'아, 알았다. 그 다음은요?'

'그런데 만화라서 어떤 점이 좋았어?'
'얼음같이 딱딱한 역사를 물처럼 쉽게 풀어 놓은 책이예요, 만화로.'
'그거 정말 멋진 표현이네. 바로 그걸 쓰면 되겠어.'
'싫어요!'
으잉? 뭐라고?
'부끄러워서 안 쓸래요'
이건 또 뭐냐. 제 머리에서 나온 근사한 표현을 쓰랬더니 부끄럽다고 절대 쓸 수 없단다.
정말 머리에서 쥐가 나려고 한다. 아들은 남 보기에 멋지고 근사하게 느껴지는 것이 부끄럽단다.
그게 왜 부끄럽냐고 설득했더니 또 버럭 화를 낸다. 내가 화를 내야 하는데 기가 막힌다.

'조선왕조실록이 여러 개가 있는데 왜 성종을 골랐어? 성종의 어떤 면이 좋은데?'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왕이예요.'
'그런 그걸 쓰는거야. 니가 왜 성종을 골랐는지 성종의 어떤 면이 좋았는지.'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줄 쓴다.
'그리고 성종처럼 너도 어떻게 하고 싶다 뭐 이렇게 네 다짐이나 느낌으로 마무리 하면 되겠다.'
'다 썼는데 또 쓰라구요? 힘들다구요!' 또 버럭 버럭.


그리하야 서로 소리지르고 중간에서 안 한다고 한 번 울고 짜증내고 난리치며 완성한 아들의 독후감은,


 「나는 이 책을 만화여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만들었다.
   유머가 많아서 아주 재미가 있다.
   나는 조선 제 9대 왕인 성종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남의 말을 잘 존중해 주기 때문이다. 」


이 다섯 줄 쓰는데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


스스로 재미를 느끼는 일에는 몇 시간이고 빠져 있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하면
한 줄의 글 가지고도 몇 십분을 실랑이 해야 한다.
독후감을 재미있게 여기는 비법이 있을까.
내가 너무 요령없이 가르친 걸까?
가르치려 하면 무조건 어렵다고 하고 화부터 내니,
내가 먼저 화내고 서로 싸우기 일쑤다.

책은 너무 너무 좋아해서 늘 책을 끼고 사는 아들이지만
그 책을 읽고 느낀 점을 간단하게 정리하거나 기록하는 등의 일은 아주 싫어해서 억지로 시키지 않았었다.
아들은 제가 좋아하는 일도 공부 같다는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거부해 버린다.
그야말로 제 맘대로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만큼 빠져 있기만을 좋아할 뿐이다.

공부나 과제의 냄새가 안 나게 아들의 흥미와 재미를 이끌어 내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친절하게 안내하는 일이란 정말 어렵다.
애써 도움을 주고 있는데 벌컥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아이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며 아들의 감정에 말려들어가지 않기엔 내 인격과 참을성도
아주 얇은 양은냄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간신이 이렇게 한 편을 쓰고 이틀 후에 또 한 편을 쓸 땐 요령을 좀 더 내 보았다.
'이번엔 니가 정말 좋아하는 책을 써 보는게 어떨까?'
'어떤 책이요?'
'해리포터 어때?'
'아, 해리포터는 정말 재미 있어요'
'그래, 해리포터는 어떤 책이야? 어떤 사람들이 나오냐고.. 축구선수들 얘기니?'
'아이참, 마법사들이 나오잖아요'
'그렇구나.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야. 거기서 부터 시작해보자'
'그리고 또 뭘 써요?'
'주인공들을 소개해주면 어떨까?'
'아... 해리포터랑, 론이랑, 헤르미온느랑.'

아들은 성종때보다 훨씬 신이 나서 쓰기 시작한다.
제가 무지 좋아하는 책이라서 역시 효과가 있구나.
'그리구요?'
'그 주인공들이 무얼 위해 싸우는거야? 누구랑?'
'악당 볼드모트를 무찌르기 위해 싸우지요.'
'그걸 쓰는거야.'
'아하... 그 다음은요?'
'그래서 누가 이겼을까? 결과가 어떻게 됐냐고.'
'음... 당연히 주인공들이 이겼지요.'
'니가 이 책에 나오는 마법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마법이 있다면서?'
'네, 스투페파이.'
'그 마법이 어떤 마법이야? 그걸 너는 어떤 때 쓰고 싶어?'
'아 알았다. 기다리세요. 써서 보여드릴께요'

아들은 신나는 표정으로 줄줄 써 내려 간다.
그리하여 보여준 내용은


  「이 책은 마법사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해리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외 조연 101명이다.
    합계 104명이 악당 볼드모트와 맞서 싸우는 마법 소설이다.
    결국은 해리포터 일당이 이기는 얘기다.
    이 소설에선 아주 다양한 마법이 나오는데 난 그중에서 '스투페파이(기절마법)'을 쓰고 싶다.
    그 마법을 잠자리에게 걸어가지고 우리나라에 있는 잠자리를 다 잡고 싶다.」


어른이 힌트라고 주는 것과 아이가 충분한 실마리라고 여기는 것은 다르다.

다 알려 주었는데 왜 못쓰냐고 야단치면 서로 싸우기 쉽다.
아이의 입장에서 충분하다고 여기도록 안내해 주는게 중요한데 이거, 정말 어렵다.
특히 쓰기를 싫어하는 남자 아이로 하여금 독후감을 쓰게 하려면 인내와 요령이 필요하다.
아이의 특성을 잘 파악해가면서 재미있다고 느끼게 해야 하는데 쉬울 리가 없다.
아이에게 툭 던져놓고 이젠 네가 해보라고 했더니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의
흥미가 유지되면서 아이의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단서들을 계속 던져 주었다.
이 방법이 좋은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재미있어 하면서 완성할 수 있도록 할 수 밖에 없다.

어찌어찌해서 두 편의 독후감을 완성한 아들은 다음번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단다.
한 번 해본일에는 저항을 덜 느끼는 아들이다. 그 한번을 어떻게 이끌어 주느냐가 늘 내겐 도전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자식놈 가르치는 일이 아닐까.
하기는 싫은데 해야 하는 과제를 잘 해내게 하는 요령을 아시는 분들의 다양한 조언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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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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